갈등해소와 친목도모에 일조, 한미친선회의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48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앞두고 서부전선의 지역을 남과 북이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를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우수한 화력을 가지고 있는 미 2사단과 7사단이 방어를 맡았으나, 그도 염려가 되어 한국군 해병대를 투입하여 현재의 상태가 유지된 것이다.
휴전협정과 더불어 미군부대 주둔은 주로 북파주인 샘내(덕천리), 곰시(웅담리), 장파리, 연풍리, 대추벌, 법원리 등에 산재하여 있었다. 미군부대를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주민이 모여들었고 그렇다 보니 미군과 한국인 사이의 시비와 싸움, 그리고 불법행위, 성병 등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한·미친선협의회’가 구성되었다.
한·미친선협의회 회원은 미군 측의 각 사단 참모 등 다섯 명과 한국 측의 군수, 경찰서장, 보건소장, 의사협회장, 농협지부장, P.T.P 회장으로 구성되어, 매월 회의를 개최하여, 당면 문제들을 해결했다.
미군 측에서는 성병관리와 윤락여성관리, 한인이 운영하는 홀에서 백인과 흑인의 차별대우금지 등의 관리를, 우리 측은 외상값 조기해결과 한인과 미군의 사소한 다툼으로 인한 출입통제를 하지 말라는 의제 등으로 회의를 개최하였다.
미군 측에서는 조금만 문제가 일어나도 미군 사병들의 출입통제(Off limit)를 무기 삼아 한국인들을 휘둘렀다. 출입통제 조치를 하면 미군이 영외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상인들이 군수를 찾아와 미군의 출입통제 조치를 해제해 달라고 탄원했다. 한국 상인들은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조르고 갔다.
한국 측의 제의에 의하여‘한미친선회의’가 열리면, 우리는 출입통제(off-limit)를 해제해 달라고 사정하고 미군이 마지못해 해제하는 듯 해결을 하곤 했다. 툭하면 출입통제를 발동하여 자기들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한국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파주에 있는 상인들은 성질이 너무 급했다. 미군 측에서 출입통제를 하였을 때, 보름 정도만 기다리면 미 사병들의 반란으로 오히려 미군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출입통제를 해제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그들은 그 보름을 못 기다려 군수가 자존심을 상해 가며 미군 장교에게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일을 종종 해왔다.
특히, 미군이 강조하는 것은 성병문제였다. 윤락여성의 수가 확실치는 않지만 그 당시 이야기로는 2만 명 정도가 있었다. 성병문제는 미 8군에서 한국 정부에 정식 제의하여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읍·면 7개소에 성병관리소를 설치하고 의사를 배치하여 전체 윤락여성이 순번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성병검사를 하고 검사증을 발급하였고 미군은 검사증 확인 후 접촉토록 하였다.
성병에 전염된 윤락여성은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군청에 설립된 성병요양소에서 집중적으로 치료하여 완치되면 다시 기존 업소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였다.
미 2사단과 7사단이 동두천으로 이동하고, 일부 병력인 봉일천의 미 공병여단‘캠프 하우스’, 영태리의‘캠프 에드워드’, 문산 선유리의‘캠프 자이안트’, 임진강 건너‘캠프 그리브스’대대 등과‘J.S.A’만 남게 되면서 성병관리소는 폐쇄되었다. 물론 윤락여성도 제 갈 길을 찾아가 뿔뿔이 흩어졌다.
한·미친선협의회도 현재 주둔하고 있는 부대장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큰 문제가 발생되지 않아 한·미친선회의를 격월제로 번갈아 가며 친목도모 위주로 개최하였다.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 작전부사단장은 우리 친선회의에 꼭 참석하였다.
미군 측에서 개최할 때는 봉일천에 있는 캠프 하우스 식당에서 술은 각자 알아서 먹을 만큼만 먹고 기본 인사를 양쪽 대표가 하고 나면 스테이크 정도의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수순이었다.
우리 측이 주체가 될 때에는 광탄면 마장리 유일레저 식당이나 다른 곳을 순회하며 개최했고 한국에 근무한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술은 취할 때까지 마실 수 있도록 했다.
강제로 마시게 하려고 해도 마시지를 않아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를 빼고 겉에 화살표를 그려 접시에 놓고 돌려, 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임이었다. 한 번으로는 취하지 않으니 미 2사단 부사단장이 한 번 돌려 모두 마시게 하고, 내가 또 돌려 모두 마시게 함으로써 화목도 다지고 재미도 있는 한미친선회가 되었다.
한번은 캠프 에드워드 대대장이 나를 보고 달걀게임이 재미있어서 한·미친선회의에서 하던 대로 계란에 화살표를 하고 돌려서 술을 마시게 하려고 접시에 올려놓고 돌렸는데 안 돌아가더라는 것이었다. 다른 장교들에게 창피만 당했다고 했다.
나는 캠프 에드워드 대대장에게 하나 잊은 게 있다고 했다. 계란 속에 있는 알맹이는 빼내고 껍질로만 돌려야 잘 돌아간다고 했더니 대대장은 그러냐며 큰소리로 웃었다.
한·미친선위원 중에, 미 2사단 작전부사단장 웰터 샤프장군(준장)은 파주 한·미친선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내가“왜, 파주에 오느냐?”고 했더니, 그는“의정부나 동두천에 가면 재미가 없어서 파주에 온다.”고 할 만큼 미군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었었다.
미 2사단 부사단장인 웰터 샤프 준장은 대장으로 승진해, 한·미연합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하자마자 내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아마도 파주의 한·미친선회의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내가 미국에 갔을 때 웰터 샤프장군이 미2사단 작전 부사단장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방성의 극동담당 정보처장으로 있을 때 당시 주미대사관 국방무관으로 있던 황진하 장군의 관사로 샤프장군 내외를 초청하여 저녁 파티에 초청한 바기 있다. 그때부터 황진하 장군과 웰터 샤프장군이 서로 알게 되었고 그 후 서로 많은 정보를 교관하며 친선을 도모하였다고한다. 황진하 장군은 월터 샤프장군의 유엔군 사령관 부임 후에도 서로 만나 파주 이야기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서로 직무에 바쁘다 보니 다시한자리에서 만나지는 못하였고 그는 한·미연합사령관의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