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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파주의 여인들 1편

파주 다율동 홍랑의 묘- 홍랑-PHOSTO

파주에는 홍랑(洪娘)이라는 조선시대 기생의 묘가 있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관물(官物)’ 취급을 받는 노비와 다름없는 천민신분이다. 그러나 기생은 미모와 지혜를 갖추고 선비와 풍류를 나누면서 양반사회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홍랑은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 3대기녀로 불리는 기생으로 정절의 의무가 없지만 최경창과 짧은 인연을 맺은 후 일부종사한 여자이다. 당시에는 “살아서는 천민이지만 죽어서 양반된 사람은 홍랑 한사람뿐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파주 다율동 고죽 최경창 시비- 홍랑-PHOSTO

홍랑은 함경도 홍원 출신으로 어려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다가 12살에 어머니가 죽자 그 지역의 관아인 북도평사의 기생으로 입적하였다. 그 후 16세가 넘던 가을에 홍랑은 당시 율곡 이이, 송익필과 함께 하는 조선 중기 8대 문장가이던 고죽 최경창을 만나게 되었다.

양평 홍랑-PHOSTO

최경창은 병마절도사 보좌관으로 대개 2년이면 순환보직 되는 자리였고 어느날 고을 원님이 초청한 술자리에서 홍랑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가을에 만나 이듬해 봄에 보직을 마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이때 홍랑은 최경창을 따라 한양까지 동행하였다가 함경도에 돌아 오는 길에 함관령에서 송별시를 지어 보냈다.

광탄면 영장리 홍랑-PHOSTO

산버들 곱게 꺽어 보내노니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파주 법원읍 초리골 홍랑-PHOSTO

이렇게 이별의 아픔과 사랑을 표현한 이 시는 당시의 신분을 떠나 둘의 각별한 감정을 표현한 글이다. 현대의 남녀라면 창 밖에 심어 두는 것이 아니라 방안에 심어 두라 하였을 것이다. 최병창은 이 시를 한문으로 옮겨 놓은 후 ‘변방곡’이라 하였고 ‘송별’이라는 답시를 보냈다.

파주 다율동 홍랑묘- 홍랑-PHOSTO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서울 경복궁 홍랑-PHOSTO

최경창은 다음 해에 병이 들어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 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들어와서 병 수발을 하였다. 그러나 1576년 봄에 사헌부는 최경창이 북방의 관기를 도성에 들여와 살게 한 것을 상소하여 파직시겼다. 최경창은 비천한 신분의 홍랑이었지만 자신의 명예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홍랑과 또 한 차례 이별하게 되었다.

파주 다율동 홍랑묘 홍랑-PHOSTO

파직 당한 최경창은 본래의 깨끗한 성품을 인정받아 복직하게되었고 몇 번 변방의 한직으로 근무하다가 1583년 4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파주의 무덤에 찾아와 대성통곡하고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흉한 모습을 한채로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홍랑이 시묘살이를 한지 9년이 되던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유작들을 모아 고향으로 피난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최경창의 유작을 가족에게 전하였고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가 비록 천한 신분의 관기였으나 집안 사람으로 여겨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파주 다율동 홍랑시비-홍랑-PHOSTO

홍랑의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지난 2000년11월 한글로 된 시 원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더 알려졌다. 지금도 여러 블로그를 보면 홍랑의 묘에는 발 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파주 다율동 홍랑 묘소 주변- 홍랑-PHOSTO

4백년전 조선의 유교적 질서 속에서도 제도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이룬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21세기 지금에는 그 옛날 교과서적인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사람이 넘치면서 서로 쉽게 만나거나 이별을 겪는다. 그렇지만 홍랑처럼 누구나 변함 없이 늘 자신을 지켜주고 바라보아 주는 그런 사랑을 마음에 그린다.< 글.사진 : 이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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