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개발을 막기위한 운정 신도시 조성
-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제14화>-
파주시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한반도 지형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또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강화섬을 돌아 황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으로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 시대에는 한때 교하가 새로운 도읍지로 거론이 될 만큼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는 고장이다.
어느 날 오후 파주 발전의 핵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상하기 위하여 심학산에 올라 동서남북을 살펴보았다. 동북쪽으로는 감악산, 파평산, 월롱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으면서 광활한 교하 벌판이 있고 서남쪽은 자유로로 둘러싸인 한강과 임진강이 김포의 애기봉과 북한의 관산반도에서 합류하여 삼각지를 이루고 있다. 조수의 영향을 받아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그곳이 마치 거대한 호수처럼 보였다. 산과 산 사이로 울긋불긋한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마치 이국(異國)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아름다운 내 고장 파주를 보다 살기 좋은 도시, 잘 정돈된 도시, 삶의 질을 높이는 품격 있는 도시로 조성하여 파주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파주를 만드는데 시장직을 걸고 개발할 것을 결심하며 산을 내려왔다.
가장 시급했던 일은 무질서한 난개발을 막는 일이었다. 고양시의 일산 신도시 개발 완료단계에서 일산신도시 건설에 참여했던 건설업자들은 지가(地價)가 저렴하고 개발하기 편리한 파주 교하지구에 아파트를 조성하기 위한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교하지구의 당시 땅값은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였다. 건설업자들이 논을 평당 50만 원씩 준다는 제안에 농민들의 마음은 흔들렸다. 일부 농민은 매매계약을 체결하였고 일부는 협상중이거나 관망상태였다. 건설업자가 토지를 확보하고 아파트 건설을 신청할 경우 국토이용관리법에 따라 시장이 4만 5천 평까지 용도변경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허가를 안 할 수도 있었지만 적법한 서류를 구비하여 신청할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만일 용도변경을 여기저기 허가할 경우 난개발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학교문제를 비롯하여 상수도, 하수도, 교통, 분뇨처리 등 엄청난 사회적인 민원문제가 뒤따르게 될 것 또한 자명하였다. 어떻게 하면 난개발을 막을 수 있을지 법적근거를 먼저 검토했다. 그 결과로 국토관리이용법의 용도변경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분명히 하여 고시를 하면 용도변경허가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얻어내었다. 1998년 7월 27일자로 파주시 교하면 지역의‘국토이용계획변경운영지침’ 파주시 예규7호를 발령했다. 이 예규가 발령되기 전에 국토이용계획변경을 신청한 열세 개 아파트 건설 업체는 군사시설보호법상 동의여부에 관계없이 허가를 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파주시 예규7호가 발령되기 전에 이미 계약을 체결한 업체, 땅을 이미 매수하고 아파트 건설 허가를 신청하지 않은 업체, 토지매수 협상 중에 있는 업체 등이 빗발치는 항의를 해왔다. 또한 큰 명함을 가지고 오는 사람, 정치인을 동원하여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 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문제는 용도변경이 아니라 도시기본계획에 의해 개발을 하려면 기획단계에서부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가장 빠른 방법은‘택지개발촉진법’을 적용하면 택지개발계획을 수립하여 건설부 장관의 승인을 받으면 도시계획을 승인받은 것과 같이 의제처리(擬制處理)가 된다. 그래서 택지개발과 동시에 아파트를 건설할 수 있는 주택공사로 하여금 개발토록 방침을 결정하고 주택공사 서울지사장을 불러 운정지구 300만평 택지개발계획을 1개월 내에 수립해 오라고 했다. 우선 군사시설 보호법에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택공사의 택지개발계획을 가지고 군(軍)에 동의를 의뢰하였으나 군사시설 보호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150만 평만 동의를 했다. 그러나 그 동의안으로는 톱니바퀴와 같아서 계획적인 택지 개발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택지개발계획을 군단장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충분한 토의를 하였다. 그 결과로 택지개발을 할 수 있을 정도로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주택공사는 승인될 것을 바탕으로 택지개발 실시계획을 수립하여 건설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시행된 사업이지만 지역의 지주들 생각은 달랐다. 택지개발은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국토이용계획변경 운용지침”고시발령 이후 택지 개발 반대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시청으로 몰려와 시청 앞마당에서 마이크와 확성기 등을 이용하여 연일 규탄대회를 열었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확성기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고 오후 4시경이 되어서야 돌아가곤 하였다.
이후 마이크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시장인 나의 상여를 메고 나와 앞마당에 매장하고 곡을 하고 달구질을 계속하였다. 교하면 사무소에서 운정역까지 벽에 붉은 페인트로“귀신은 무얼 먹고 사나 주민의 땅 갉아먹는 송달용이나 잡아먹지!”,“쓰레기 같은 송달용은 혀 깨물고 자결이나 해라!”,“파주시장 송달용! 제2의 이완용!”,“난개발의 주범 파주시장 송달용은 즉각 사퇴하라!”,“돈만 알고 주민 땅 팔아먹는 송달용 숨통이나 찍어라.”는 등의 문구가 도로와 건물을 뒤덮었다. 일부 주민들은 경운기를 끌고 나와 도로를 막고 시위를 하다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 의해 제지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지주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경찰을 통한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은 채 주택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해 나아갔다.
그러던 중 시간이 지나도 시의 방침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택지개발반대투쟁위원들이 면담을 요청하였다. 일단, 택지개발반대투쟁위원들이 협상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시청 회의실에서 허심탄회하게 협의를 시작하였다. 지주들의 요구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택지개발은 무조건 중지하라. 둘째, 보상금은 얼마나 줄 것인가? 셋째, 보상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보상금을 책정한다고 하는데, 공시지가를 높일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을 설득하는데 진실성을 갖고 앞장섰다. 교하지구를 그대로 둘 경우 건설업체가 매수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 매수 가능한 토지만 매입하여 개발하기 때문에 공동주택단지와 개인 주택단지 사이의 잔여 토지는 가치 없는 토지가 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토지이용에 영구적인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건축통제와 계획적인 개발을 통해서 난개발을 막아 살기 좋은 파주가 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을 했다.
보상 문제는 지주들이 바라는 정도의 적정 가격을 책정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공시지가는 현실에 적합하도록 균형을 맞추어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런 나의 말들을 그들은 신뢰하지 않았다. 또한 택지개발을 하면 당장 어디에 살며 그 대책이 있느냐고 다그치면서 확답을 받을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이 시위는 약 40여 일 계속되었다. 이들이 필요한 경비는 데모에 참여하지 않은 세대 당 매일 5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충당하였다.
한편 친구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 친구의 농지가 교하택지개발사업지구내에 편입이 된 모양이었다. “네가 뭔데 조상대대로 이어 내려온 땅을 네 마음대로 소유자의 동의 없이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택지개발을 한다면 너는 시장의 자격이 없으니 사퇴를 해라. 서울의 주택과장이나 해먹어라. 이완용보다 못한 놈이다.”라는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판의 내용이었다. 친구로서 좋은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할지언정 욕설이 너무 지나친 것 같이 섭섭했지만 먼 앞날을 내다보고 시정(市政)을 펼치려면 이런 일도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참았다. 매년 연말이면 3·1회라는 이름으로 부부동반모임을 가져왔던 회원 중 한 사람이었기에 그 섭섭함은 더하였다. 2003년 말 서울 양천구 목동에 있는‘전천홍’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다른 친구가 나에게 찾아와 내게 편지를 보냈던 친구의 근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친구는 교하택지개발사업에서 보상을 많이 받아 빌딩을 구입하고 월세만 3,000만 원을 받으며, 사무실을 차려 떵떵거리며 살고 있어 자기는 가끔 그 빌딩에 가서 점심과 술을 얻어먹고 놀다가 온다고 했다. 교하택지개발사업 당시에 받은 편지를 떠올리며 그 친구에게 내가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더라고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한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역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교하운정지구의 택지개발사업을 반대하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시간이 있을 때 전화하면 점심이나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울분이 터졌다. 내 생전 처음 심한 욕을 했다.“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너한테 저녁을 사달하고 해, 인격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그 친구가 보낸 편지 내용과 내가 당시 감정으로 써놓았던 답변서를 회원 전체에게 보내고 그 모임에 안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 모임은 이 사건 이후로 해산된 일도 있다.
나는 택지개발반대투쟁위원에게 보상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상물조사(地上物調査)와 측량을 해야 보상을 책정할 수 있으니 조사에 대한 동의를 요청했다. 결국 동의를 얻었고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였다. 나는 업무에 따른 지식을 충전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도시환경대학원 3개월 과정을 다녔다.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일주일에 두 번 대학원에 나갔다. 대학원에서 3박 4일 싱가포르와 호주의 수도인 캔버라의 현지를 견학하였다. 캔버라의 인구는 30만 정도로 도시 한가운데 호수가 있고 고층건물은 중앙정부청사와 전쟁기념관 건물뿐이었다. 일반 주민 주택과 외교대사관 건물도 5층을 넘는 건물이 없었다. 낮은 건물들이 숲에 쌓여 있기 때문에 정말 아름다운 도시의 조경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호수에서는 백조가 유유히 노닐고 호수주변엔 잘 정돈된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어른들은 오순도순 앉아서 정담을 나누고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은 정말 지상낙원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지도교수인 황기원 교수는 나에게 파주시도 새로 건설되는 도시인만큼 캔버라와 같이 도시계획을 잘해 보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캔버라와 같이 하고 싶어도 호수가 없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는 파주에는 한강과 임진강이 있으니 강을 호수처럼 계획하면 되지 않겠냐는 대답을 해주었다. 이때 황기원 교수께 파주시 도시계획위원으로 와주실 것을 요청하였고 교수께서 쾌히 승낙을 하였다.
파주시 도시계획위원으로 모신 황기원 교수의 도움을 받아 교하의 도시계획을 재검토하였다. 또한 경기도 내에서 도시계획 전문가라고 할 정도의 경험이 풍부한 도시개발과장, 도시국장을 역임한 이창우 부시장, 김기성 도시건설국장, 김영구 도시과장, 윤명채 도시계장과 파주시 도시계획용역 담당회사 직원과 같이 내가 연수를 다녀온 싱가포르와 호주의 캔버라를 다녀와서 운정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재검토하라고 했다. 그 결과 도심밀집지역의 랜드 마크(land mark) 및 도심공원과 저밀도 개발을 운정신도시에 접목하였고, 경제적인 자족도시를 구상하였다. 난개발을 막기 위하여 지자체 최초로“교하지구 토지이용계획 운영지침”을 시장 훈령으로 발령하면서 이미 개발된 교하택지를 포함하여 현재의 운정 1,2,3지구를 통합하여 성남시 분당 수준의 운정신도시의 계획을 변경하였다.
한때, 송달용 상여를 만들어 메고 와서 시청 앞마당에 묻고 달구질을 했던 주민들은 막상 보상이 기대 이상으로 나오자 다른 곳으로 재빨리 이주하였고, 나만 시청 앞마당에 답답하게 홀로 묻혀 있었다. 그렇게 8년이 지난 어느 날, 택지개발반대 투쟁위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나를 반갑게 얼싸 안았다.
그때의 일이 많이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당신들은 보상받고 다른 데로 가고 달구질 당한 내 시체는 시청 마당에 아직도 묻혀 있으니 숨이 답답하다. 소주라도 한잔 부어 놓고 꺼내 주어야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후 교하면 오도리의 충남식당에 당시의 반대 투쟁위원들이 모였다. 매운탕에 소주 한잔 하면서 옛날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버린 과거사를 꺼내 놓고 회포를 풀었다. 그 소주 한잔으로 나는 답답했던 시청마당 지하에서 나왔다고 한마디 했다. 그렇게 거나하게 취한 충남식당의 밤은 깊어 갔다.
얼마 전 친구와 같이 심학산에 올라 몇 해 전 나만의 파주의 꿈이 있었던 동서남북의 파주를 바라보았다. 파주의 꿈이 현실이 되었구나! 이제는 파주에 뼈를 묻어도 후손들에게 지탄의 대상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지난날의 고민과 괴로움은 사라지고 감격의 마음이 밀려왔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운정신도시가 태어나기까지 그 어려움을 기록한 표석을 어느 공원의 한구석에라도 남김으로써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은 작은 욕심이 생긴다.
그리운 옛 고향 어디로 갔나 | 송달용
못살고 어려웠던 시절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동네 사람 모여 마을 안길 넓히고
쌀 한 톨 더 생산하려 농사법도 바꿔 가며
잘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던
그 옛날의 추억이 새롭다.
이웃 동네 천지개벽 변화는 스며들고
변화에 겁먹은 동네 사람들
옛날 방식 고집하며 시대 흐름 막으려고
트랙터, 경운기 상여 메고 달구질하며
그 바람 막으려 해도
거센 바람 앞에 힘이 달리는구나.
조상들의 애지중지 가꾸며 살아온 옛 터전
집과 농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정했던 이웃들은 제 살길 따라 고향을 떠나니
정들었던 동네 어귀 아침저녁 인사하던
옛 어르신 만날 길 없고
논바닥 참게 잡고
송사리 떼 모여들던
실개천도 찾을 길 없다.
하루가 다르게 하늘로 치솟는 아파트
탁 트인 도로, 문화시설, 낯선 사람들
아파트 생활 불편은 없지만
초가집 부뚜막 무쇠솥 쌀밥이 그리워진다.
그리운 내 고향 어디로 갔나.
이제는 마음속 깊숙이 젖어 든
추억 속에서나 찾아야겠구나.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