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 views

내가 살던 풀무골 -제35화-

pajuin7

내가 살던 풀무골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35화-

야동리는 풀무골, 창골, 원골, 두문골의 네 개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가 태어난 곳은 풀무골이다.

우리 동네 북쪽의 안데무골이란 곳에서 부터 시작되어 흐르는 실개천은 교하 벌판 중심으로 흐르는 공능천(曲陵川)까지 연결되어 장마철이 되면 이 실개천을 따라 벌(野)에 모래가 쌓어 이름 붙여진 모래턱에 허름한 대장간이 있었다. 풀무골의 이름이 그 대장간의 풀무에서 유래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고, 야동리(冶洞里)의 첫 글자인 야(冶)자가 풀무 야자로 그 첫 글자를 따서 풀무골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풀무골은 북쪽으로 바구니에 달을 담았다고 하는 아름다운 월롱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이름도 아름다운 은봉산(隱鳳山)이 가로막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이름 모를 나즈막한 야산으로 포근히 둘러쌓여 있다. 또한 남쪽으로는 공능천을 따라 탁트인 기름진 농토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조상님들이 심어놓은 100년이 넘는 아람드리 오리나무들은 추운 겨울에 몰아치는 서북풍을 막아주는 방풍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아람들이 나무숲은 각종 새들의 번식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자연속에 50여 세대가 실개천을 가운데 두고 아래마을, 윗마을이라 서로 부르며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순박한 농촌마을 이다.

나는 이 곳에서 철없는 어린시절을 자연을 마음껏 누리며 뛰고 놀면서 자랐다. 봄이면 월롱산 기슭에서 산딸기 산머루와 칡뿌리 캐먹고, 장마철이면 공능천에서 실개천을 따라 올라오는 고기를 잡고, 방학때면 아침 일찍 일어나 이슬을 헤쳐가며 부시시 눈을 뜨고 고개를 드는 기와버섯, 꾀꼬리 버섯, 싸리버섯을 따오면 어머니는 구수한 된장찌게를 끊여주셨는데 아직도 그 맛을 잊을수가 없다.

아람드리 큰 나무 위에 어미 밑에서 철모르고 자라고 있는 아기새를 짓궂게 꺼내어 기르다가 죽으면 밭 모퉁이에 정성껏 묻어주고 개구리, 멧두기 잡아 먹이며 잘 기른 새들은 방학이 끝날무렵 자연으로 돌려 보냈다.

동네 친구들과 딱지치기, 구슬치기, 잣치기 놀이를 하다가 작은 일에 의견이 엇갈리면 코피가 터지도록 싸우기도 하고 어둠이 오는 것도 잊은채 놀다보면 저녁먹으라고 찾으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못내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흥겹고 다정한 고향이다.

고기를 잡아 동네 찬지를 치르던 개(川)막이의 기쁨과 수리 시설이 없었던 교하 벌판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은 벼수확이 끝나면 다음해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3개면(아동면(현, 금촌동), 교하면, 탄현면)의 농민들이 총 동원되어 공능천을 인력으로 막아 보(洑)를 만들어 물을 저장했다.

겨울이면 교하벌판도 온통 얼음판으로 변하고 봄이면 기러기떼가 찾아와 장관을 이룬다. 농사철이 되면 겨울에 가두었던 물을 이용해 못자리와 농사를 시작하고 농사철의 한계인 하지(양력 6월 21일 경)가 되기 전에 저지대의 농사를 짓기위해 공능천 보를 터서 물을 뺀다. 그러면 보 안에 갇혀있던 고기를 잡으려고 3개면 사람들로 온 벌판이 뒤덮인다. 그물, 가리(주로 가시없는 아카시아나무로 직경 60㎝ 정도, 높이 1m 정도로 둥글게 엮고, 그 윗쪽에 손을 넣어 고기를 잡아올릴 수 있는 20㎝ 정도의 윗쪽 공간이 있도록 만든 것)로 논바닥을 찍고 그 안에 갇혀있는 고기를 잡는다. 고기반 물반이었다. 큰 고기는 물이 빠지면 물살을 가르고 도망 다닌다. 그 고기를 쫒아 다니며 맨손으로 덮쳐서 잡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웃음이 절로나는 즐거운 장관이다.

벼가 누렇게 익고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면 논바닥에 허물을 벗고 벗으며 여름내내 자란 참게가 월동과 산란을 하러 깊은 강으로 가는 길목에 그물을 치고, 비바람 겨우 가리는 참게원두막에 밤세워 잡은 알이 꽉찬 참게로 장을 담그면 그 맛 또한 일품이다.

어느덧 80년이란 세월이 흘러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친구는 벌써 고인이 되었는가 하면 살아있는 친구도 농사일에 시달려 검은 얼굴에 주름살이 깊이 패이고 구부정한 허리에 퇴행성 관절염 등으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노인정에 앉아 그 옛날 젊은 날의 추억을 되새시며 쓸쓸히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다정했던 친구를 찾아가 소주한잔 놓고 옛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그립다.

순박하고 순수했던 농촌마을이었던 우리동네는 지금 현대화의 물결따라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던 실개천은 복개가 되어 자동차 길로 변했고, 마을 어귀 아람드리 오리나무숲은 수명을 다해 사라졌고 잡다한 다른 나무가 100년의 대를 잇기 위해 자라고 있다. 마을 앞길을 지나던 비포장 우마차길 모래턱 신장로길은 4차선으로 확장 포장되어 금촌 시가지에서 자유로와 연결되어 있고 그 주변을 따라 주유소와 식당, 농협 농산물 가공 공장 설립으로 탁트인 교하벌판을 가로 막고 아름다운 은봉산 기슭에는 골프연습장과 마을 한가운데에는 종이 봉투를 만드는 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초가집은 양옥집으로 변하여 자연속의 푸근하고 아름다운 풀무골은 무질서한 난개발로 주민 삶의 질이 향상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옛 모습은 추억 속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다.

 

편집자 알림

‘나는 파주인이다’  송달용 전 파주시장의 회고록  목차 순서 중 일부 개인적인 주제는 별도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금번 목차인 ‘3학년2반 선생님이십니까?’는 별도 게재하고 다음 목차를 앞당겨 게재 합니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나는 파주인이다’ 목록으로 바로가기

 

One thought on “내가 살던 풀무골 -제35화-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