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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의 태극기, 누가 더 높은가? -나는 파주인 이다 23화 –

pajuin7

대성동의 태극기, 누가 더 높은가?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23화-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해방 이후, 약 50세대에 300명 정도가 농업을 주업으로 생계를 꾸리며 평화롭게 살아 왔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주민들의 일부는 피난을 가고, 포화 속 마을에는 일부 주민만이 남게 되었다.

1951년 10월부터 정전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면서 판문점 근처에 있는 남쪽의 대성동 마을과 북쪽의 기정동 마을은 군사분계선상의 이유로 전투지역에서 제외하기로 양측 합의를 보았었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당시 비무장지대 내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도록 휴전협정 조항에 규정하고 같은 해 8월 3일, 대성동에 30세대 160명이 마을을 형성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행정구역은 파주시에 속하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유엔군 사령부의 관리를 받고 있어 납세의무와 국방의무를 면제 받고 있다. 군사분계선 남쪽 자유의 마을 대성동에는 사람이 살고 있으나, 북쪽 평화의 마을 기정동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선전마을로 현대식 주택을 지어 놓고 있었다.

대성동 주민은 유엔군의 동의를 얻어 능력 있는 만큼 농지를 개발하여 농사를 지었다. 1962년도에는 벼 1만 가마를 생산하였으나 1993년에는 3만 8천 가마로 생산이 증가했다. 전체 경지면적은 483㏊이고, 농가 평균 11㏊로 호당 평균 연 소득이 6,700만 원이나 되어 가장 잘 사는 농촌마을이 되었다. 군사분계선 가까이 농사를 지을 때에는 민정군인(民情軍人)이 행동을 같이하며 주민을 보호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의 대성동초등학교는 1954년부터 마을 자체로 운영하다가 1968년 정식 인가가 되었고 학교 졸업식에는 졸업생이 많아야 3~4명이고, 적을 때는 1~2명뿐이었다.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각 부처 요인들과 유엔사령부에서 참석하는데, 졸업선물이 학생 수에 비해 너무 많아 선물에 묻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주민은 1년에 8개월 이상 마을에 거주하여야 주민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고 마을입주가 제한되어 있으나 아들이 없는 집의 딸과 결혼하여 데릴사위가 되는 경우는 입주할 수 있다. 여자가 외지의 남자와 결혼할 때는 거주권이 상실되지만 대성동 남자가 외부의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는 입주권이 허락되기도 하는 아주 특수한 지역이다.

1970년대는 남과 북의 경쟁이 치열하였고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는 80m 높이로 크게 건설되어 대성동에서 보면 올려다보도록 되어 있었다. 남한의 태극기와 북한의 인공기 중 어느 것이 더 높게 휘날리는가가 이곳에선 경쟁이었다. 대성동 개발계획에 의하여 마을 뒷산 상단부에 85m의 국기게양대 철탑을 세워 태극기를 게양하고 평일에는 가로 12m, 세로 8m, 경축일에는 가로 18m, 세로 12m 크기의 태극기를 달도록 하였다.

문제는 그 큰 태극기를 제작하는 회사나 개인이 없을 뿐 아니라, 태극기의 천이 가벼워야 바람에 펄럭일 수 있는데, 그 천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가지로 연구한 끝에 낙하산 천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천을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어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군수 납품처에서 공급받도록 하였다.

제작업체를 찾고 있는데 마침, 서울 방산시장 상인의 제의가 들어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제작토록 하였다. 태극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노천에서 제작할 수 없어서 방산초등학교 강당 사용을 승낙 받도록 해주었다. 방학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제작했는데, 1972년 제작 당시 가격이 100만 원이었다.

리모컨으로 조작하여 태극기를 철탑에 자동으로 올리도록 설계되었고, 게양하는 데만도 1분 30초가 걸렸다. 태극기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축 늘어진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설계했다. 그 때문에 철탑 사이에 태극기가 끼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그래서 재설계를 해야 했다. 100m로 더 높이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축 늘어진 태극기가 철탑에 끼지 않도록 깃봉대도 더 길게 제작했다.

북한에서는 처음 85m에서 100m로 우리가 설계를 변경한 이유도 모르고, 남한에 질 수 없다고 기존 80m에서 165m로, 우리보다 더 높게 다시 건설하여 지금도 계양하고 있다.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큰 국기 게양대가 아닌가 싶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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