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
평양을 찾아간다. 임을 찾아서.
임이사 못 뵈와도 소식이나 들을까 하고 …….
비행기는커녕 군용트럭 하나도 봐주는 이 없는데
여비를 준다는 ‘북한파견문화반’ 그 명단에도 이름은 없다.
맨주먹으로 나서도 평양은 내가 먼저 가고 말리라.
따라나선 동행은 운삼이와 재춘이 녹번이 고개 넘어 몇리를 왔노
여기는 파주땅 봉일천리. 주막집 툇마루에 앉아 술을 마신다.
군가도 소리 높이 몰려가는 트럭 위엔 가득 탄 젊은이와 아낙네들의 사투리가 웃고 있다.
고향 가는 기쁨에 ……
나를 위해 세워주는 트럭은 하나도 없고
걸어서 파주땅에 오늘밤을 자야하나 평양을 가야 한다
봉일천 주막에 해가 지는데 … (1950.10월 파주군 조리읍에서)
-인권환 고려대명예교수-
부친의 납북을 확인한 지훈은 부인도 만나지 않은채 집을 나서 시내로 들어간다. 그날 밤 당시 의사당 자리에서 촛불을 켜 놓고 귀환보고 강연회를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평양행을 결행한다. 그의 평양행은 종군기자의 임무에서, 그리고 납북된 부친을 찾는다는 두가지 이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을 떠난 지훈은 걸어서 봉일천(奉日天)에 이른다.
평양을 가야 한다. 임을 찾아서. 임이사 못뵈와도 소식이나 들을까 하고…… 비행기는 커녕 군용트럭 하나도 봐주는 이 없는데/여비를 준다는 <북한파견문화반> 그 명단에도 내 이름은 없다/맨주먹으로 나서도 평양은 내가 먼저 가고 말리라…… 여기는 파주땅 봉일천리. 주막집 툇마루에 앉아 술을 마신다…… (봉일천 주막에서, 마지막 부분)
봉일천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의 지명이다. 그리고 봉일천은 6.25 발발 직후 일선에서 밀려내려오던 백선엽의 1사단이 6월 28일 봉일천국민학교에 CP를 차리고 마지막 저항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국군은 수일간 적과 맞서 끈질기게 싸웠지만, 더 이상의 항전이 불가함을 알고 후퇴를 결행, 경기 시흥에서 합치거나, 아니면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가 되자며 철수한 곳이다. 이 때 연대장에는 최경록, 최영희 등이 있었다.(백선엽 증언, 중앙일보)
봉일천에서 하룻밤을 보낸 지훈은 다음날 요행이 군용트럭에 편승하여 황해도 연백·해주를 향해 달리다 3.8선(현 휴전선 이전의 남북 경계)를 넘는다.
(전략) 젊은 중위는 연백 사람/고향집에 가는 것이 즐겁단다/문득 헷드라이트에 비취는 큰 글씨 있어 <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사진 左)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주 서서 우는/3.8선 위에 비가 내리는데/옮겨간 마음의 장벽을 향하여/옛날의 3.8선을 내가 이제 넘는다(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 끝부분)
젊은 중위의 고향집(중위는 4년전 월남하여 군에 입대, 북진하는 우군을 따라가는 길에 고향 연백에 들른 것이다)에 도착하여 푸진 음식을 대접받는다.
(전략) 한 잠든 닭을 잡아 모가지를 비틀고 둘러앉아 한 그릇씩 국수잔치가 푸지다. 내 뜻 아니한 이 촌가에 와/그 즐거움을 함께 하노니/반가운 손이 되어 아랫 목에 앉아 웃는 인연이여/흐린 하늘에서 달빛이 다시 나온다/평양 가는 트럭에 뛰어 오르니 밤은 3경! (연백촌가, 일부)
천신만고 끝에 지훈은 마침내 평양에 도착한다. 대략 10월 중순경으로 생각된다. 지훈으로선 2번째 오는 평양이었다. 즉, 10년 전인 1940년, 평원선(平元線) 철로를 놓을 무렵, 친구 두명과 함께 돈도 없는채 걸어서 평양에 왔던 일이 있었다.
평양을 찾아와도 평양성엔 사람이 없다/대동강 언덕길에는 왕닷새 베치마 적삼에 소식(蘇式)장총을 메고 잡혀오는 여자 빨치산이 하나/스탈린 거리 잎지는 가로수 밑에 앉아/외로운 나그네처럼 갈 곳이 없다 (중략)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던 그 평양을/오늘에 또 내가 왔다 평양을 내 왜 왔노/대동강 다락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본다/패강무정(浿江無情), 십년 뒤 오늘! 아 가는 자 이같고나/서울 최후의 날이 이 같았음이여! (패강무정, 끝부분)
지훈은 약 50일간 평양에 머물렀다. 그동안 많은 견문과 체험을 쌓았지만, 부친의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가 주로 한 일은 아직 평양에 남아있던 옛 지인들과의 문화활동, 후에 평양에 온 평양출신 친구들과 함께 “평양 문화인 서울 시찰단”의 구성과 이의 운영이었다. 그러나, 그해 말 중공군의 참전으로 부득이 12월 3일 오영진(吳泳鎭)과 함께 비행기 편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리고 중공군이 다시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1951년, 1월 3일, 마포에서 한강을 건너 다시 대구로 향한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출처 : 삼산사랑방 카페 /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bDri&fldid=2QtE&datanum=5218&openArticle=true&docid=bDri2QtE521820100817225648>
작품 전문 소개
조리읍에 거주하는 김훈민 ( 조리읍 주민자치 위원)씨가 봉일천 마을에대한 어메니티(Amenity) 조사시에 6.25 당시 조지훈 시인이 봉일천 주막에 머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상도 영양군 소재의 ‘지훈문학관’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였다. 지훈 문학관 원장이 ‘봉일천 주막에서’ 작품의 전문을 보내 주어서 파주이야기에 게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