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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 정태진 선생 기념관 – 제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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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 정태진 선생 기념관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30화-

어느 날, 중앙대학교 정해동 경제학교수가 나를 찾아왔다. 재경 파주향우회 모임에서 자주 보았기 때문에 초면은 아니었다. 금촌 제2지구(금촌동 쇠재 향교마을 일대) 860만㎡(26만 평)를 택지개발을 한다고 들었다며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글학자 석인 정태진 선생은 정해동 교수의 부친이었다. 정교수는 어릴 때 살던 집이 택지개발을 하게 되면 철거될 것 같다면서 아버지의 추억이 어린 그 집을 그대로 보존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주택공사는 원래 금능리(쇠재마을)을 택지개발에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지금의 후곡마을(뒷골)을 중심으로 4만 5,000평을 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옥 현황 조사와 측량을 마치고 보상 철차를 거처 보상금을 결정하고 주민들에게까지도 통보된 상황에 주민들은 보상가가 적다고 반발하면서 시청에서 연일 데모를 했다. 그래서 보상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평가사, 주택공사, 주민대표들이 참석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택지개발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회의를 마쳤다. 주민들은 보상가격을 높여 달라는 것이지 개발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나는 뒷골을 개발하기 전에 금능리(쇠재 향교마을) 주변을 순회한 바 있었다. 마을의 가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새마을사업으로 길을 개설하기는 하였으나, 그나마도 차량이 겨우 다닐 정도였다.

주택공사 서울지사장에게 뒷골 개발은 그만두고 금능지구 26만 평을 개발하도록 계획서를 작성해 오라고 했다. 이제는 금능지구 주민들이 주택개발반대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시청마당에서 데모를 했다. 문제는 주민들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주택공사 서울지사장에게, 보상가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주민이 납득할 만큼 책정해 주라고 했다. 보상가는 주택공사가 부담하는 것이 아니고 입주민이 부담하는 것이니, 보상가는 주민이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할 만큼은 책정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민이 어느 정도 납득할 만큼 책정되었다. 뒷골(후곡마을) 주민들은 우리도 금능지구만큼 준다면, 개발에 동참하겠다는 의사표시를 주택공사에 찾아가 했다. 그리하여 뒷골 4만 5,000평, 금능리 26만 평, 합계 31만 평을 동시에 개발하게 되었다.

나는 석인 정태진 선생이 파주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금능리 출생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946년으로 기억된다. 그때“정태진 선생님은 파주 출신 한글학자시고 독립운동을 하신 훌륭한 분”이라며 교장 선생님께서 금촌초등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그분에 대해 한 강의를 들었던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에는 중복되는 말과 방언이 많다는 정태진 한글학자의 말씀을 바탕으로, 우시로, 뒤로, 빠꾸, 라인, 선, 줄, 금, 모찌떡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정해동 교수가 정태진 선생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정해동 교수와 함께 그의 고향집인 금능리 주택을 찾아가 확인했다.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이뤄져 있었다. 시멘트 기와로 지붕개량을 하여 원형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집의 보존 여부는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시공업체인 주택공사에 확인한 바, 그곳은 매립지로 7m를 더 높여야 하기 때문에 가옥을 보존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주택공사와 이에 대한 협의를 한 결과 정태진 선생의 기념관을 세우자고 협의를 했다. 이에 정해동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려 드렸다. 택지개발이 완료되고 정태진 기념관은 중앙도서관 옆에 한옥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의 한글을 지키기 위해 옥고를 치르신 정태진 선생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보다 많은 부모들이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여 파주 출신 중에 이토록 훌륭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리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애향심을 그들이 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석인 선생의 문학비와 일생을 이곳에 간략히 적어 본다.

 

석인 정태진 선생 문학비

 

한 생각

어버이 주신 입 겨레에게 받은 붓을

헛되이야 쓰오리만 어이 거저 두오리까?

무거운 임의 은혜를 못 갚을까 두려워.

 

우리말 크나큰 홰에 한글의 불을 다려

백두산 상상봉에 높이높이 세우고자

배달의 넓은 들 위에 고루고루 비추리.

 

우리말 크나큰 배에 한글의 돛을 달고

먼 먼 바다 밖에 두루두루 다니고자

고려의 귀한 보배를 온누리에 전하리.

1952. 2. 14.

석인 정태진 선생

정태진(1903~1952) 선생은 본관이 나주이며, 호는‘석인’이다.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능리에서 정규원과 죽산 박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글학자요, 독립운동가인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등여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그 뒤, 미국으로 유학해서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에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영생고등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에는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서‘조선말 큰 사전’ 편찬을 맡았다. 1942년 9월,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도의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아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자 조선어학회를 복구하고 큰 사전의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희대학, 중앙대학, 홍익대학, 동국대학 등지에서 강의했다. 1951년에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그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와 큰 사전 속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1월, 뜻밖의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저서로는『한자 안 쓰기 문제』,『시가집』,『아름다운 강산』과 『조선고어방언사전』,『중등 국어독본』,『고어독본』등을 남겼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받고, 1997년 11월에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1998년 10월에는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이에 선생의 아름다운 시와 문장, 그리고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기려 후세에 거울이 되게 하고자 온 나라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이곳 파주시의 연고지에 문학비를 세운다.

2006년 6월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이응호 삼가 짓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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