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선 희-
사월 식목일이 지난지 이틀째다. 잔망스러운 봄은 이제 보드라운 고양이털처럼 보들보들 하늘과 마음을 녹아내린다. 재개발지구 율목동은 오늘도 스산한 발걸음을 맞이하면서 아직도 이전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마을 주민들을 더 다급하게 만든다.
오전 11시 25분. 뜻밖의 조우는 하양 조팝나무다. 밥풀떼기처럼 생겨서 조밥이라고도 불리는 조팝나무는 잔잔한 가지를 여러 대 모야 듬뿍 이란 단어가 어울리게 너울너울 밥풀을 내밀었다. 꽃 한 송이가 단정한 사랑을 나타내고 올망졸망 달린 노력들이 만들어냈음을 꽃말과도 같이 어울림으로 꾸렸다. 따스하지만 강한 햇살 아래 자신을 열어보고 서있는 조합은 봄의 또 다른 눈부심으로 다가온다.
대문 옆 하얀 라일락은 화사함 그 자체이다. 꽃말 아름다운 맹세를 나타내듯 정갈하고 굳은 결심이 보인다. 새 생명의 나무초리 곁으로 비집고 올라온 꽃덩어리 하얗고 하얘서 도리어 푸른빛이 돌아 손바닥 위에 얹어지는 순간 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소중한 새싹의 흐름이 하늘로부터 이어지는 연결을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까 싶어 눈을 질끈 감고 되돌아선다.
집을 사이로 뒷마당 보라색 라일락이 사랑의 싹을 틔우며 화사함을 빛내고 있다. 조금은 멀찌감치 있어 그 화사함이 반짝이는걸. 눈에 다 담아낼 수 없지만 벌써 그 향기는 진동한다. 서양에서는 라라 꽃이라고 불린다는데 영화 라라 랜드의 흥겨움과 즐거움이 향기를 실어 다가온다.
율목동에는 오동나무가 8그루(정확하지는 않지만)정도 꿋꿋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우등 지를 넓게 펼쳐 서 있다. 오동나무는 땅의 기운과 관계없이 어디서나 잘 살고 옛날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갈 때 장롱을 만들어주었다니 쑥쑥 크는 모습의 선한 쓰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보라색 꽃이 화사하게 피면 고상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고상은 오동나무의 꽃말이다. 봉황이 오동나무에만 앉는다는 상서로운 나무라는걸 알게 되면서 그 넓은 잎과 추상적인 이미지를 끌어내는 보랏빛의 어우러짐은 늘 경외심을 갖게 되는 대상이 되었다. 마당에 심어 키우면서는 해마다 자라나는 모습에 놀라고 또 놀라운 경험을 가진다. 너무나 쑥쑥 커서 자신의 진가를 다른 나무들에게 뽐내는걸. 좋아하기에. 딸이 있다면 저 나무처럼 부드러운 넓은 마음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오동나무 꽃을 닮았으면 하는 염원도 생긴다.
나무에서 연꽃모양으로 피는 모습이라 목련이란 말을 가진 꽃은 북향 화라고도 불린다. 꽃의 얼굴은 늘 북쪽을 향해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꽃말 고귀함, 숭고함처럼 누구도 성큼 다가설 수 없는 그 어떤 분위기를 자아낸다. 1994년 설립된 중남미문화원은 4월의 전령으로 목련나무가 가득하다. 한 나무만 자목련으로 그 고고함을 드러내고 음악당과 중세시대의 작은 성당은 누구나 종교에 귀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올해로 꼬박 27년 동안 매년 4월에 하얀 목련을 보러 소풍을 다녔다. 아무도 없는 평일에 연녹색 철제 의자에 앉아 혹은 긴 의자에 누어 바라보는 목련을 보고 있자면 푸른 하늘빛이 어릿어릿 스치는 사이로 연꽃송이가 동동 떠있다. 그러면서 처연하게도 뚝하고 떨어지는 꽃잎은 금세 짙은 밤색으로 변해가며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목련이 피는 시기는 매년 빨라진다.
27년 전 처음 중남미 문화원을 찾은 날은 4월 25일이었다. 상큼하게 다가온 봄만 되면 목련이 피는 시기는 놓칠세라 동동거리는 마음을 억누를 길 없다. 왜냐하면 온난화로 목련을 보는 날짜가 점점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의 한 달 정도가 빨라진 현실을 맞이했다. 2021년 올해는 4월 1일에 갔는데 벌써 목련이 지고 있었다. 사과도 대구에서 파주로 이전해오는 큰 소동을 벌이는데 목련도 한파를 빠르게 걷어내고 자신의 꽃받침으로 빠르게도 봄 한편에 엉덩이를 붙인다.
겸손과 열정, 평범을 담당하며 아가씨꽃, 애개씨꽃, 각씨꽃으로도 불리는 산당화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오고 간 오래된 마을임을 금방 나타내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산당화’ 북한에서는 ‘명자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산당화는 보는 이의 마음을 연지곤지 분위기가 들게끔 살포시 그 꽃잎을 흔든다. 여러 갈래의 나뭇가지가 설레설레 모여 덩어리 형식으로 피어나기에 사월에 안성맞춤이다.
연분홍 치마에 속에는 노란 암술과 수술이 부끄러운 듯 돌아선 모습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그들의 사랑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키는 나무 대는 굵직한 모습으로 자신의 우세를 세우고 있다. 더욱 사랑스럼을 담아내는 연초록 암술수술받침이다. 작은 접시로 펼처놓은 반짝임에 곳곳한 속살로 이기적 유전자를 내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곱게 단장한 산당화 꽃무더기는 골목길 언덕 곳곳에서 자리하고 있는 눈부신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