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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1호인 통일로는 경의선에 이어 파주 근현대사의 중요한 역할을 해온 젖줄이다.
조선시대 9대 간선로중의 국도1호선 격인 의주대로는 서울-벽제-광탄-파주-임진나루-동파나루-개성-평양-의주와 중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로서 정치·군사적인 기능을 수행하던 중요한 도로 역할을 하였으며 대체로 산간지방을 통과하는 구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와 국도가 건설 당시 의주대로가 비교적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단점으로 통일로 구간은 지금의 위치인 서쪽의 저평한 지역을 따라서 국도1호가 건설되었다.
경의선이 개통된 1906년을 전후하여 통일로 구간도 교하현(지금의 금능동)과 이어지는 도로에 맞추어 공릉천과 산이 이어지는 하천변 중심으로 도로가 확장 되었을 것이다.
당시 국도1호는 문산읍 마정리까지 연결된 것으로 추측되나 임진강을 통과하기 위한 교량이나 연결도로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결로는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임진강 철교 상류의 임시도로나 교량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며 국도1호선은 일제의 러일전쟁과 중국침략을 위한 중요 보급로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발발시에는 임진강 철교로 이어지는 적의 주공격로 방어하기 위해 육군1사단이 임진강 철교에 폭약을 설치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기도 하였으며 후퇴시 국도1호선 중심으로 방어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미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국도1호선은 서부전선의 주 공격로로 이용되었으며 경의선 기차도 운행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다급하게 후퇴를 하면서 1950년 12월 31일 미군이 장단역에 정차된 기차를 총격으로 거부하고 후퇴하였으며 임진강 철교도 이 당시에 폭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1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다시 북으로 반격하면서 임진강은 주요 전선으로 부각되었고 국도1호선은 주요 보급로 역할을 하였으며 임진강 도하를 위해 부교나 임시가교를 설치하여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였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통일로는 포로수송 및 정전회담 참석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으며 1971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은평구 진관내동을 지나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에 이르는 68.5㎞ 구간의 비포장 국도를 4차선으로 확포장하여 1972년 3월에 개통하였다.
통일로 확포장 개통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이 72년 7월4일 남북곧동성명 발표를 위한 남북협상 왕래 도로로 이용할 목적을 갖고 현대건설에 공사를 맏기어 1년만에 완공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전에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통일로와 임진강철교를 이용하여 평양을 방문해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북한의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은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1일까지 통일로로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한 것으로 되어있다.
휴전후에도 통일로는 남북교류의 주통로로 이 곳을 왕복하는 북한 당국자에게 북한보다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기위해서 정부가 관심을 갖고 도로주변 환경정비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통일로 주변환경 정화사업은 당시 파주군에서 직접 담당하여 추진하였으며 당시 임명제 군수에게는 가장 막중한 사업의 하나로서 도로변의 공원화 사업, 꽃길 가꾸기, 주택개량 사업을 벌려 왔다.
지금도 통일로 주변에는 당시에 정화사업으로 주택개량이 된 빨간색과 파랑색의 지붕의 미니2층이라 건물 형태가 많이 남아 있다. 70년대말 이런 건물을 짖기 위해서 주택별로 담당공무원을 배치하여 건축비가 부족한 가구는 융자를 지원해주면서 기존 주택을 개축하게 하였다.
이와함께 통일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도로변에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지금의 장곡 소공원, PX마을 관사 주변 공원, 봉서리 공원, 여우고개 공원이 당시 사업으로 조성되었으며 매주 토요일이면 공무원들이 제초작업에 동원되었다.
은행나무와 코스모스도 이때 통일로 전구간에 식재하여 관리해왔으며 통일로의 명물로 유명해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지금은 파주시의 상징물로 지정 되어 있다.
<다음 계속, 2011. 1. 6, 이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