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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준의 중국 단둥 여행기

 – 한경준 파주시 평화협력과장 –

압록강 단교(斷橋)에서 파주의 미래를 바라보다!

지난 9월 통일운동 시민단체에서 주관하는 백두산·단둥 통일기행을 신청했지만, 9월 중순 파주에서 처음 확진돼 경기북부지역을 휩쓴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한 비상근무로 참여하지 못했다. 통일기행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이미 발권했던 왕복 항공권에 대한 수수료는 고스란히 손해 봤으나, 다행이 개별비자를 받아 3개월 유효기간인 중국 비자는 남았다, 이 비자가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단둥을 홀로 찾아 가게 된 계기가 됐다.

출발 하루 전 9월말 통일기행을 다녀온 지인에게 최근 단둥 분위기 대해 이야기를 해 줄 사람으로 단둥에서 대북사업을 오래하신 분을 소개 받았다. 단둥 한인회장을 두 번 지내고 현재 재중단둥 한국인회 고문을 맡고 있는 분이다. 이희행 고문님은 마침 시간이 괜찮다며 2박 3일간 드라이빙 가이드를 해 주셨다. 본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4일 오후 단둥역에서 이 고문을 만나 먼저 후산장성(虎山長城)으로 향했다. 후산장성은 생김새가 누워있는 호랑이처럼 생겼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압록강 하구에 있던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1990년대 중국이 명나라식 장성을 쌓고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후산장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하이관(山海關)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이 그 곳을 찾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후산장성에서 북녘 땅을 바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농철이면 드넓은 밭에서 일하는 북녘 동포들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30여분을 달려 찾아간 후산장성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매표소 문을 두드렸지만 일체 반응이 없었고, 안내도 전혀 없었다. 오후 3시 반 정도의 시간으로 보아 동절기 폐문 시간도 아니었다. 국경 관광도시 단둥의 관광시즌이 10월말로 종료되는 걸 감안하여 비시즌이라 문을 닫았으리라 짐작학고 좀 더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

한 발짝만 넘으면 북한이라는 이부콰(一步跨)다. 압록강 하류 구간중 철조망이 쳐진 구간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한곳이 바로 이곳이다. 철조망은 탈북 방지보다는 국경선을 정확이 하려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한다. 북한과 중국은 1963년 국경이 확정됐는데, 당시 압록강은 공유하고 압록강의 섬은 대부분 북한에 소유로 정했다, 퇴적작용에 의해 중국 본토와 거의 맞닿게 된 섬들에 철조망이 설치된 것이다. 다음날 가본 황금평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중국의 압록강 공유는 탄현면 만우리에서 강화도 말도까지 70여키로미터를 ‘한강하구 남북공동수역’으로 관리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황금평 벌판에서 작업하는 북한 사람들

마침 며칠 전 속초에서 있었던 민주평통 파주시협의회 워크숍때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북의 동남쪽 해금강을 바라본 필자는 후산장성에서 노을에 물든 초겨울 북의 서북 땅을 바라볼 기회가 사라진 아쉬움을 뒤로하고 단둥시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낯익은 지명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행록(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이 기록한 일종의 공무여행 귀국보고서)에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처음 밟은 중국 땅이 지우롄성(九連城)이다. 지우롄성 압록강 건너편이 바로 의주다. 일제 강점기 압록강철교(현재 조중우의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을 잇던 옛길의 중심지가 바로 의주와 지우롄성이다. 한양~파주~개성~평양 ~의주~중국 으로 이어지던 의주대로는 조선시대 6대로 중 가장 중요한 도로의 하나다. 압록강에 다리가 생기면서 그 다리의 시종점인 신의주와 단둥으로 발전의 축이 옮겨 갔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인 압록강에 혼자 걸어갔다. 오전시간이라 동쪽 하늘에 머문 해로 인해 신의주가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초겨울 찬바람이 부는 압록강 너머 신의주 시내에는 돔 형태의 지붕을 한 주상복합빌딩 등 중고층 건물들이 눈에 띠었다. 필자는 단둥이 처음은 아니다. 2004년 6월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서 한 달간 중국어 연수를 받을 때 첫 번째 주말여행지가 단둥이었다. 벌써 15년 전이다. 압록강 단교와 유람선, 압록강 공원 등을 둘러봤다. 당시 압록강 건너 신의주는 단둥에 비하면 너무 초라했다. 특히 야간 단둥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비하면 어둠에 싸인 압록강 너머 신의주는 적막했다. 15년 만에 다시 찾은 압록강 너머 신의주에는 북중우의교를 중심으로 건설용 타워크레인도 보이고 말쑥한 건물들도 제법 볼 수 있었다.

30위엔(우리 돈 약 5천원)을 받는 압록강단교 입구에는 어설프게 한복을 걸치고 기념사진을 찍는 중국 단체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신분증만 있으면 여권 없이도 신의주 관광이 가능하다. 작년에 북한을 찾은 외국 관광객이 1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과 미국 사람 (영주권자는 가능)만 북을 여행할 수 없다. 압록강단교는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던 다리다. 1911년 일본이 대륙침략을 목적으로 건설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중국의 개입을 막기 위해 절반을 파괴하여, 현재 절반만 남아 있다. 파괴된 절반은 교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며칠 전 파주장단콩축제 때 임진각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경의선 철교와 길이만 다를 뿐 그 모양이 너무 똑 같다. 압록강단교 끝에서 강 너머 북녘 땅을 한참 바라보았다. 중국 관광객들은 붉은색으로 ‘압록강’이라 새겨진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압록강 단교를 다시 돌아 나오는데 바로옆 ‘중조우의교’에서 뜨문뜨문 단둥에서 신의주 방향으로 향하던 트럭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또 잠시 후엔 8량의 객차를 단 열차가 신의주 방면으로 운행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중조우의교는 1943년에 건설된 다리로 944미터의 편도 철길과 자동차용 도로가 각각 설치돼 있다. 중국과 북 무역량의 80%가량이 이 다리를 통해 오고간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막 지났다.

오전 10시에 단둥에서 신의주로, 오후 4시엔 신의주에서 단둥으로 차량이 운행된다. 도광차는 600대 정도로 중국이 500대 북한이 100대 가량 등록돼 있다. 열차는 주4회 베이징에서 출발하고, 주3회 단둥에서 출발한다. 특히 금요일에는 물동량이 증가해 많은 차량이 중조우의교를 넘고 있던 것이다. 길게 늘어진 컨테이너 트럭들을 보며 과연 북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제재가 실효성이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신의주로 향하는 중조우위교 컨터이너 트럭행렬

한국에서는 건설용 못하나, 비닐하우스용 철사 한 꾸러미마저도 전략물자라 하여 북에 보낼 수 없는데, 전통우방인 중국에서 출발하는 저 많은 컨테이너에 과연 어떤 물건들이 들어 있을까 생각해보면 촘촘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이 ‘자력갱생’하는 근원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단둥시내에서 압록강 하구로 좀 더 내려가면 단둥신도시다. 아직은 조성이 끝나지 않아 빈 땅이 많지만 단둥시인민정부도 몇 년 전 신도시로 이전했다. 신도시지역에 위치한 신압록강대교와 황금평을 둘러봤다. 황금평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북한의 섬으로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신도군에 속한다. 면적이 11.45㎢로 여의도 4배 규모다. 황금평은 오랜 퇴적으로 중국땅과 맞닿아 있으며 경계표시를 위해 철조망이 2중으로 설치돼 있다. 철조망 너머 북한 노동자들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다.

신압록강대교

북한과 중국은 2012년 8월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더밍 상무부장간 황금평 개발을 협의하였으나 이후 토지에 대한 보상 문제와 장성택 처형 등으로 사업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관리위원회 건물 한 동 외에는 농지로 사용되거나 황무지로 방치되고 있다. 황금평이 개발될 경우 진행과정을 유심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접경도시인 파주에서 북측과 경제협력을 할 때 개발모델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2박 3일간 필자를 안내한 이희행 고문님은 원래 시멘트 회사에 다녔던 분이다. 90년대 말부터 단동을 왕래하며 의류 임가공 대북사업을 하다가 2003년 단둥에 정착했다. 2010년 5.24 조치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북사업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다. 나는 감히 내년까지 버텨보시라 했다.

강주원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그의 저서 ‘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에서 국경도시 단둥에서 살아가는 한국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 즉, 한국사람, 북한사람, 조선족, 북한출신 화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 고문이 단둥역에서 헤어질 때 건네준 ‘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를 다롄(大連)으로 가는 고속열차 안에서 단숨에 읽었다. 국경과 국적을 넘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네 부류의 사람은 물론 중국 사람들과도 아웅다웅 살고 오순도순 지내는 단둥이 되는 날 한반도에도 진정한 평화가 깃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도라산역에서 경의선을 타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상상을 해봤다. 단둥역에서 다시 이희행 고문을 뵐때는 이런 상상이 꼭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압록강단교 표지석앞에선 필자
이희행 단둥한인회 고문과 함께 식사중인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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