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 views

어그 부츠의 면접- 전현자

어그 부츠의 면접

날씨가 추워지니 마음까지 움츠러든다. 두꺼운 옷들을 세탁해오고 겨울 신발들을 꺼내놓았다.
신발장 먼지를 털다보니 구석에 놓인 비닐봉지가 눈에 띈다. 풀어보니 아이가 신던 양털 부츠다.
춥거나 눈이 내려도 정말 편하고 따뜻하다며 아이는 몇 년 겨울을 이 신발로 지냈다.

뭉친 신문지를 안에 넣었건만 앞부분이 찌그러지고 색깔은 더 거무스름해졌다. 윗부분의 털은 아직도 푹신한데 발등이 너무 꾀죄죄하다. 그럼에도 정성껏 싸 두었던 마음,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어그부츠의 면접- 파주문학동네

올해 초 아이의 3차 시험이 이틀에 걸쳐 있었다. 첫날 실기를 무사히 치렀다. 다음 날은 면접이다.송추 쯤 가니 서설인 듯 제법 큰 눈발이 날린다. 옆에 앉은 아이는 면접 연습을 한다. 과연 무엇을 물어 볼 것인가. 준비된 답안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으로 초조하다.

제 시간에 닿았으니 일단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시험장에 들어가려고 짐을 챙기던 아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면접 때 신을 구두를 집에 두고 왔단다. 추운 날이라 어제 갈 때는 어그를 신고 구두는 따로 챙겨갔는데, 오늘 아침엔 무심코 어그만 신고 온 것이다. 믿기지 않아 방석 넣은 가방을 다시 살펴봤다. 역시 없다.

차들이 계속 도착하고 수험생들과 부모들이 들고 나는데 내 눈엔 신발만 보인다. 이른 시간 어디서 구두를 구할 수 있을까. 어둑한 거리를 살펴보고, 어쩌다 눈에 띈 사람에게 물어 봤지만 제화점은 없단다. 혹시 편의점에 아가씨라도 있나 싶어 기웃거렸지만 남자다. 발을 동동 구른다는 말이 이때 쓰이는구나 싶었다.

곰곰이 생각을 하다 우선 관리자를 찾아갔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잠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온다.자신들도 추워서 모두 부츠를 신고 왔으며, 심사위원장 말씀인즉 신발은 아무런 감점 요인이 되지 않는다고 했단다. 그 말에 안도하며 차로 돌아와 불안해하는 아이의 짐을 챙겨 시험장으로 들여보냈다.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나 한심하여 스스로를 나무라는데 높거나 낮은 저마다의 신발을 신고
제 갈 길을 바쁘게 간다. 저 신발이 맞을까, 이 신발은 별로고하며 혼자 속으로 헤아리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사장 현관으로 갔다.살면서 그렇게 유심히 남의 신발을 살펴본 적이 없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데 구두 신은 사람이 하나 밖에 없다. 새벽이라
나처럼 대충 세수만 하고 입던 옷으로 나온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사이즈를 물었더니 아이보다 5mm가 크다.
게다가 엄지 부분이 튀어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이거라도 어떻게 싶었는데 “우리 애가 나오면 가야 되는데”한다.

다른 이의 감점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는 시험, 사정을 헤아리고 도와주기는커녕 몰인정한 모습에 울컥하다가
빌려준대도 싫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신발이라도 빌려 신겠다고 내려온 아이는 차라리 내 신발이
제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그것 역시 낡고 허름하다. 하필이면 이걸 신고 왔나 후회가 막심하다.

사람들 발만 쳐다보다가 단념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안타깝다. 시험이 시작됐다. 이젠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구한다 해도 전달 할 수 없다. 저 혼자 미운오리 새끼처럼 왕발을 하고, 숨소리조차 나지 않을 긴장 속에서
또 다른 고민에 빠져있을 것이다.

어그가 새것이라도 신경 쓰일 텐데 하물며 삼사년 된 것이다. 지난 해 A/S를 받았지만
눈과 비에 젖어 발등에 얼룩진 것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옷은 정장인데 신발은 때 묻고 얼룩진 것을 신게 되었으니, 가지런한 것들이 갑자기 이가 빠진 것 같아
우스꽝스럽다. 준비성 없는 사람이라고 감점 받지 않을까 걱정이다. 시험장 안에서 빌리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정 거슬리면 벗으라고는 했는데 상황을 모르니 답답하다. 애써 그 관리자의 말을 믿기로 했다.

제비뽑기에서 거의 끝번을 뽑아 몹시 긴장한 상태에서도 주변을 보니 차례가 되자 저마다 신발을
바꿔 신고 나가더란다.신발을 벗기보다 그냥 신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감독관의 말대로 면접을 보았고
준비한 만큼의 답을 했지만, 나만이 다른 모습이라는 심리적 위축감, 불안함, 서러움 등등이 끝나는
순간 눈물로 쏟아진다. 수고 많이 했어, 이제는 더 이상 신발에 신경 쓰지 말자고 아이를 위로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주일 후 아이는 고대하던 소식을 들었다. 어그송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고 무용담처럼
얘기할 여유도 생겼다.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으로 개성을 나타내는 신발, 그것만으로 주인의 성격과 직업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제 몫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의 신발은 듬직하다. 아무에게서나 빌릴 수 없고, 때와 장소 옷차림에
따라 달라지는 신발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차마 버리지 못한 부츠 때문에 생긴 헤프닝이
재미있는 추억이 되어 참 다행이다. 아이가 신발 끈 조여매고 흔들림 없이 다음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11년)

전현자(문산)
북티즌 회원
파주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