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임진강에는 조선시대에 서울과 의주를 국도1호를 잊는 임진나루가 있었다. 이곳 임진나루는 현재 문산읍 임진리에 위치하고 임진철교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남과 북을 잊는 국도1호선의 도강구간이었다.
이곳 임진나루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왜군의 공격을 피해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 갈때 급하게 도하했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4백여년이 넘는 지금이지만 선조가 도하할 때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불태운 건물이 화석정이라는 것과 임진나루의 건물이라는 기록이 서로 대치하며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
앞으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화석정을 태워서 불을 밝혔다는 것을 ‘화석정 소각설’이라하고 임진나루에 있는 승청(선사 관리 건물) 또는 승정(임진진 성곽 위의 누각) 태웠다는 기록을 “임진나루 소각설”이라고 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화석정을 소각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국민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1592년(선조25년) 4월30일 선조 임금이 벽제~혜음령을 지나 임진나루에 도착 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내려 주변이 칠흑 같이 어두워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임진나루 주변에 있는 화석정에 불을 붙여 뱃길을 밝히고 임진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화석정- 파이자료모음 |
이 화석정은 1581년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선조때 서인의 수장인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가 동인인 유성룡이 반대로 무산되고 파직되면서 낙향한 곳이다. 이때 이이는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화석정이 불에 잘 타도록 기둥과 서까래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바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대하여 저술한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화석정 소각설과 다르게 임진나루에 있는 승정 건물을 헐어 목재를 불태워 뱃길을 밝히고 왜군이 뗏목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전란의 원인과 전황, 실책들을 기록한 전란사로 임진왜란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백성들의 임금과 조정에 대한 원망 등을 담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석정을 불태웠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기록으로 남겨 놓은 정사도 개인의 입장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유성룡이 기록한 징비록의 내용도 사실이 아닐 수 있어 믿을 수 없고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화석정 소각설을 신뢰한다고 말한다.
선조가 임진강을 도하할때 화석정이나 승정을 소각하여 조명을 비추게 한 사건은 어느 건물 태웠는지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기록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중요한 논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역사학자들도 화석정 소각설과 임진나루 소각설에 대하여 진위 여부를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은 찾기 어렵다. 따라서 이 논쟁은 상대방의 역사관 탓으로 돌리며 또 하나의 역사 속으로 흘러갈 수가 있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와 이를 토대로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의 두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당시를 더 합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점이다. 상반되는 두 측면 중에 객관적인 사실에 대하여 이 소각설을 재조명 하려고 한다.
대동여지도- 파이자료모음 |
임진진 고지도-성벽과 누각- 파이자료모음 |
화석정에서 본 임진나루 북단- 파이자료모음 |
화석정과 임진나루 거리표- 파이자료모음 |
임진강 북에서 본 화석정- 파이자료모음 |
현재 임진나루 전경- 파이자료모음 |
임진나루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임진나루 맞으편의 동파나루는 퇴적층이 있는 곳으로 거리가 가깝지만 수심이 깊은 곳이다. 또한 임진나루 상류인 화석정이 위치한 지역은 수직에 가까운 적벽이 있으며 임진나루 하류는 경사도가 가파른 산이 위치하고 강폭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임진나루는 강과 인접해 있으며 화석정은 적벽 상단보다 높은 산마루에 위치되어 있어 강변보다 60~70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한다. 강 북단에 있는 동파나루에서 임진나루와 거리는 314M, 동파나루에서 화석정까지의 거리는 678M 이격되어 있다.
강 북단에 위치한 동파나루는 문헌이나 고지도에 나타나지가 않아 대동여지도에 동파역이 하류방향에 위치한 것을 미루어 임진나루와 직선 거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거리를 측정하였다.
1592년 4월30일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는 날은 비가 억수 같이 내려 어둡기 때문에 가시거리가 짧아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상황이면 가시거리가 50미터 이내일 수 있다.
요즘 시대 기준으로 보면 보통 안개로 가시 거리가 제한 되는 기준을 1km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또 안개로 비행기의 이착륙이 금지되는 가시거리는 공항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인천공항의 경우에는 200m 이상으로 정하고 있다.
그날 비가 억수같이 온다는 날의 저녁때라면 가시거리는 상당히 짧았을 것이다. 화석정이 거의 7백여m 떨어져 있고 70미터 이상의 고도에 위치해 있어 사실상 화석정을 소각하여 임진나루에 영향을 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왜군이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화석정을 소각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데는 산악지형으로 인하여 20여분 이상 소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나루에 있는 승정을 소각하는게 훨씬 손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 일 것이다. 특히, 왜군이 뗏목을 만들기 위해 임진나루 주변에 있는 건물을 헐어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승정을 소각했을 것이다.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화석정 소각설은 객관성에서 임진나루 소각설보다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이지는 못하다.그러므로 임진나루 소각설이 사실이 확률이 높은 것이다.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반드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난 당시 선조 임금의 도하작전을 유성룡과 이이의 제자들이 서로의 입장에 따라 달리 기록했다고 한 것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어느 설에 더 객관적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역사 기록은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입장이 달라 질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면서 감정적으로 역사를 논쟁하는 것은 임진왜란이 한국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논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기상- 파주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