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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해마루촌이 건설되기까지-제5화- 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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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해마루촌이 건설되기까지

– 나는 파주인이다 / 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 제5화 –

장단군은 1945년 분단의 아픔을 안고 38선 이남지역에서 면적 722㎢ 10개면으로 군청 소재지는 장단면 도라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과 동시에 네 개면(장단면, 군내면, 진동면, 진서면)은 파주시에 편입되었고, 장남면은 연천군으로, 다섯 개면(강산면, 대감면, 대남면, 소남면, 장도면)은 D.M.Z와 북한으로 편입되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60여 년간 모진 피난 생활을 해 온 장단 군민들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토지대장과 개성등기소의 등기권리증을 갖고 있어도 소유권 행사를 할 수 없었다. 지적복구(地籍復舊)가 되지 않아 누구의 땅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3년 민통선 북방 임진강 건너편 주민통제 지역인 군내면 백연리에 정부는 정책적으로 통일을 대비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통일촌을 조성하고 80세대를 입주시켰다. 그리고 미 복구 상태에 있는 농지를 소유자와 관계없이 경지정리를 하여 가구당 논, 밭을 합하여 7,200여 평을 무상으로 분배하여 영농토록 하였다. 또한 추가로 100만 평의 콩단지를 조성하면서 출입영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옛 장단군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장단군 지주협의회’를 만들어 끈질기게 내무부에 민통선 북방 장단지역을 지적복구 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며, 집단행동도 불사하였다. 이에 내무부는‘장단군 지주협의회의’의 주장대로 지적복구를 함으로써 토지소유자와 영농자간에 소유권 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통일촌 주민의 토지에 대한 새로운 소유자가 나타나 환수하겠다는 주장에 대해 국가에서 무상으로 분배하여 소유권 이전까지 해줄 것으로 알고 입주했던 통일촌 주민들의 집단행동을 통한 반발은 대단하였다. 결국 지주와 주민과 군청의 협의에 의하여 통일촌 주민들이 평당 3,000원에 매수하는 방향으로 민원은 일단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통일촌지구 내에 토지소유자가 아직도 일부는 매도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1991년부터 장단 군민들은 미수복지구에 입주 영농할 수 있는 정착촌 건설을 요구했다. 이미 대성동, 통일촌에 152세대 660명이 입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출입영농이 아니라 입주영농을 허가 할 것을 청와대와 국방부는 물론 당시 여당인 민자당과 국회국방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착촌 조성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작전상 이유로 군부가 강력히 반대를 하였고 정착촌 조성에 필요한 예산확보도 어려워 사실상 포기 상태에 있었다.

1999년 3월 해빋다트 한국본부 정근모 이사장과 필리핀 현장 방문

1999년 경기개발연구소 직원이 도지사님의 지시라고 하며 찾아왔다. 세계 해비타트(Habitat)대회를 유치하는데 적지를 물색중이라고 했다. 나는 임진강 북방 미수복지구에 유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제시와 현장을 방문하고 도면에 유치장소인 동파지구를 표시해 주었다. 몇일 후 파주가 개최적지라는 지사님의 결심을 받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지사님에게 파주에서 세계대회가 개최된다는 소문이 나면 지가(地價)가 상승할 것이니 토지 매입자금을 지원하여 줄것을 건의하여 10억원의 지원을 받아 동파지구에 토지 30,485평을 구입하였다.

해비다트 자원봉사자들이 주택을 짓고 있다

 

경기도는 2001년에 세계 해비타트대회를 파주에서 개최키로 하고 한국 해비타트 본부와 협의가 이뤄졌다. 임창열 지사는 나에게 199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되는 세계대회에 참석하여 운영상황을 확인하고 준비계획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아세아에서 처음 개최되는 필리핀 마닐라 대회에 한국 해비타트 정근모 이사장을 비롯한 약 200명의 대규모 봉사단과 같이 참석하여 각국에서 참여한 봉사자 7,000여명이 사랑의 집짓는 현장과 운영상황을 3월22일부터 25일까지 3박 4일동안 두루 살피고 돌아왔다. 우선 파주시 해비타트 지부를 조직하였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목사이신 이용순 파주공업고등학교(현 세경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이사장으로 하고, 실행위원장에 장철수 장로, 상임이사에 이순웅 목사, 그리고 정인철, 강연진, 양상규, 정산준, 박종철, 권경환, 이봉춘 목사님을 선임하였다. 또한 장로이사로 남궁육, 심광용, 정행직, 이인기, 김찬주와 우춘환 성도를 선임하여 파주시 해비타트 지부를 결성하고 한국 해비타트 본부에 설립신고를 하였다.

2000년 해비다트대회 카터대통령 통일촌 격려 방문 (우측에서 두번째가 카터 미국대통령, 그 왼쪽이 송달용 파주시자)

나는 해비타트 이사회에서 해비타트 운동은“모든 사람에게 안락한 집있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집없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사랑의 집 지어주기’운동이며 현재 전미국의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의 주도하에 전세계 79여개국이 참여하는 가운데 해비타트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파주시에서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이유는 미수복지구에는 지장물이 없고 지가도 저렴하며 60여년만에 장단군민을 수복시켜 출입영농에서 고향의 입주영농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사회에서 파주에 국제대회개최여부를 집중적으로 토의 끝에 파주에 유치하려는 목적과 취지는 좋으나 세계 각국의 봉사자 약 7,000여명의 숙식(宿食)문제와 미수복지구의 지뢰 등 군사적 안전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파주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기도 지사에게 주행사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줄것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2001년 한국에서의 국제대회는 8월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에 걸쳐 지미카터Jimmy Carter전 미 대통령 부부등 29개국에서 총10,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주, 태백, 군산, 경산, 파주 등 6개 지구로 분산 개최하여 136세대의 집을 지었다. 이에 우리 파주는 이미 구입해 놓은 동파지구에 건축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절차상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통일촌 인접한 곳에 별도 12세대분의 대지를 확보하고 세계대회에 맞춰 우선 8세대분을 착공하여 건축중에 지미카터 전미대통령이 격려차 통일촌 현장을 방문하였으며 한국에서의 세계대회는 무사히 마쳤다.

이후, 이미 매입해 놓은 동파리 100,777㎡(약 30,485평) 농지는 정착마을을 조성하는데 사용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군부대와 관계기관에 협조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1사단장과 1군단장을 만나 설득을 하였고, 국방부까지 끈질기게 방문 건의를 하였다. 그 결과 정착마을 조성을 위한 민원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국방부 작전처장 주관 하에 회의를 소집했다. 군에서도 육군본부 작전과장, 1군단 작전참모, 1사단 작전참모가 참석했고 민간 측에서는 파주시장, 경기도관계관, 통일부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 작전처장실에서 회의를 하였다. 파주시장으로서 먼저 정착촌 건설에 대한 파주시의 입장을 다음의 네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영농 출입 시간을 통제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데 많은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과비용과 저소득으로 영세농을 면할 수가 없다.

둘째, 민통선 북방에 대성동과 통일촌 주민 152세대 660명이 이미 입주하여 농사를 짓고 있어 추가 입주하여도 작전에 지장이 없다.

셋째, 전방에 주민이 입주하면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넷째, 6.25 피난 후 60여 년간의 피난생활에 고통을 덜어 주고, 입주영농으로 인한 소득증대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의 주장에 군(軍)측은 시종일관 민통선 북방에 정착촌을 조성할 경우 평시 경계 작전과 전시 주민철수통제(住民撤收統制)문제로 입주영농은 안 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회의의 분위기가 작전처장이 정착촌 마을조성을 반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올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면 할 말은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처장님 죄송한 말씀인데, 여기에 계신 작전의 전문가이신 작전참모님들은 오해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국가의 기본계획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각 분야별 전쟁도상훈련(c.p.x)을 밤을 새워 가며 30여 년간 해왔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징후가 있을 때 지역작전 사령관이 주민 대피령을 발령하면 작전에 지장이 없도록 주민 이동로를 따라 이장(里長)이 제대장이 되어 이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는 1972년 파주군 내무과장으로서 문산읍 마정리 최북단에서 주민 300명과 함께 20㎏의 짐을 지고 걸어서 2박 3일 동안 주민 이동로를 따라 행주나루를 배를 타고 건너서(그 당시는 행주대교가 없었으므로) 부천시 소사초등학교까지 훈련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 기본계획도 모르고 즉흥적인 생각으로 작전을 판단한다면 30여 년간 밤을 새워 가며 훈련한 것을 어디에 사용합니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음대로 결심하십시오. 회의는 이것으로 끝마칩니다.”그리고 자리를 일어섰다. 작전처장은 내 말에 결론을 보류하고 다음에 가부를 연락하겠다며 회의를 마쳤다.

회의가 있던 날부터 열흘이 지나 국방부로부터 현장에서 토의를 하겠다는 공문이 왔다. 현장토의를 열심히 준비하던 중 국방부로부터 다시 현장토의를 중단한다는 공문이 왔다. 아마도 1군단장이 1군단 지역의 작전권이 군단장에게 있는데 국방부에서 왜 간섭을 하는가, 만약 문제가 있으면 국방부 작전처장이 책임을 질 것이냐는 등의 항의를 하여 현장회의가 중단된 것이다. 우연히도 1군단장인 박영익 장군은 교하면 송천리 출신으로 군에서도 판단력이 뛰어난 장군으로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후 1군단장이 입주영농을 결심한 것 같았다. 1사단장이 임진각에서 나와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1사단장은 그간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고 입주영농을 승인하겠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참으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사용된‘정착마을’이라는 명칭에서‘수복마을’로 고쳐 부르기로 하였다.

해마루촌 전경
해마루촌의 다양한 가옥

토지매입도 끝나고 군부대의 수복마을 조성도 승인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택지 조성과 도로포장에 소요되는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내무부 취약지구 개발사업 예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시건설국장인 김기성 국장이 내무부에 가서 협의한 결과 어느 정도는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도시건설국장은 시장이 직접 교부세 과장에게 협조를 구하면, 특별교부세로 추가 지원을 받아 부족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했다.

나는 2001년 추석을 보름 앞두고 내무부 교부세 과장과 실무계장을 만나 사업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거부하는 여비를 책상서랍에 억지로 넣어 주고 교부세과에서 나왔다. 내가 교부세과에서 나오자마자 국무총리실 감사관이 교부세과장과 실무계장 서랍에서 내가 넣어 준 여비를 압수하고 나를 따라와 총리실로 가자고 하였다. 총리실에서 돈을 준 확인서를 쓰라고 하여 사실 그대로 썼다. 사실 공직생활에서 처음 당하는 일이라 손이 떨렸다.

국무총리실 비서실장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선처를 부탁했다. 저녁 늦게 내무부 교부세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당신 때문에 나의 앞날이 막혔다 하며 나에게 책임을 지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나를 공박(攻駁)했다. 교부세 과장 자리는 다음 국장 진급의 영 순위였기 때문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당시 김정길 내무부 장관을 직접 만나서 징계를 받지 않도록 건의를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즉시 내무부장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장관님을 만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시간을 조절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장관과 같은 당 민선시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고 다음 날 10시에 장관을 만나 민통선 북방의 수복마을에 대한 상세한 사업내용과 더불어 지원해 준 하영제 과장과 계장이 여비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강제로 서랍에 넣은 것이니 징계를 받지 않도록 선처해 달하고 거듭 부탁을 했다.

그 후 교부세과장은 징계 없이 진주시 부시장으로 좌천되었고 내가 준 여비는 총리실에서 나에게로 반송되어 왔다. 교부세 과장은 진주시 부시장으로 있다가 고향인 남해에서 군수로 출마 선언을 하자, 상대방 측에서 부정행위로 내무부 교부세 과장에서 좌천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듣고, 내무부와 감사원에 확인한 결과 파주시장의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하여 이를 확인하러 파주에 간다는 소문을 듣고, 하영제 부시장으로부터 남해군 지역신문 기자가 확인하러 가면 잘 처리하여 달라고 전화가 왔다.

기다려도 사람은 오지 않고 남해군의 지역기자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다. 파주시장이 남해군수 출마자인 하영제 후보에게 내무부 교부세 과장 당시 돈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어 왔다. 당신이 무엇인데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하느냐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하영제 교부세 과장이 파주 발전에 엄청난 도움을 주어 시장 판공비에서 여비를 조금 준 적이 있다. 판공비는 시정 운영에 필요한데 사용하도록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법적으로 보장된 범위 내에서 사용한 것을 부정행위라고 신문에 보도한다면 나는 당신을 명예 훼손죄로 고발할 것이라고 했다.

2006년 남해군수 하영제의 편지

그 후 하영제 과장은 남해 군수로 당선이 되었고 평생 짊어지고 갈 죄의식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여비사건으로 혼은 났지만 예산은 순조로이 지원되었고 택지조성 과정에서 지뢰 662개를 제거하는 등 위험한 공사를 하였다. 또한 도로포장 및 마을회관, 식당 등 공공시설도 깨끗하게 마무리 되었고 60세대의 입주자도 선발되었다.‘아름다운 해가 뜨는 언덕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해마루촌’이라 지었다. 해마루촌의 조성계획은 60세대 집의 형태를 각각 다르게 설계하고 집집마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연결되도록 설계를 하였고 집을 지을 때에는 시에서 택지별로 제시한 주택형태로 지을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택지 부지 매도 가격은 특수지역임을 감안하여 평당 8만 1,500원으로 결정하였다.

주민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무상으로 주던가, 임대해 달라고 몇몇 사람의 주도하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수복마을 총 공사비는 택지매입비, 택지조성비와 공공시설 건립비(마을회관 식당), 도로포장 등 총 80억 1,100만 원이 투입되어 조성되었다.

평당 65만 4,000원의 비용이 들었지만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주민의 토지매입비는 시비 10억 원만을 조성원가로 산정한 8만 1,500원으로 책정한 것이다. 시는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정산원가는 특수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국도비를 제외한 시의 자금만으로 책정한 것이다. 또한 임대로 입주를 하게 되면 후에 택지가격 상승 등의 원인으로 임대료 상승이 일어날 것이고 최종적으로 택지를 매각할 떄 택지가격 상승으로 인한 많은 민원이 발생할 것은 누구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임대로 입주하겠다는 주민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입주자로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택지가격을 납부할 수 없는 사람은 입주 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했고, 주택모형(住宅模型)도 시에서 제시하는 것으로 지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행히 입주주민들이 시의 원칙을 잘 지켜 주어 지금은 잘 배치된 다양한 주택으로 우리나라에서‘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알려져 MBC방송국을 비롯한 여러 언론사에서 방영 및 보도를 하였다.

 

200.1.10 경기일보 보도

이렇게 해마루촌은 탄생하기 까지 험난한 고개를 넘고 넘어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주민들이 보람을 갖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소원으로 남아 있다.

<자료파일 제공 :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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