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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기업 모토로라 공장이 파주에 들어서다.-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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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기업 모토로라 공장이 파주에 들어서다.

– 나는 파주인이다 / 송달용 前파주시장 회고록<제6화>-

교하면 문발리에는 파주 최초의 산업공단이 조성되어 있다. 1996년 4월 초순, 모토로라 회사에서 맹 상무라는 회사 간부가 찾아왔다.‘모토로라 코리아’를 파주로 이전했으면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며 회사에 대한 설명을 했다. 모토로라는 반도체와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미국 회사로, 미국의 우주선이 달에 착륙할 때, 통신시설을 담당한 회사였다고 했다. 1967년, 서울 광장동 1만 2천 평 부지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도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1984년에는 직원 수가 5천여 명을 넘어서면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10%를 차지할 만큼 큰 기업이었다.

파주는 작은 중소기업체가 산재해 있기는 하나, 자랑할 만한 큰 공장은 없었다. 세계적인 반도체 공장이 파주로 이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파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나는 맹 상무에게 파주로 공장을 이전한다면 적극적으로 행정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덧붙여 교하면 문발리에 작은 산업단지가 있는데, 자유로가 있어서 서울과 가깝고 인천공항과 인천항만과도 1시간 내에 갈 수 있는 위치이니 공장부지로써는 최적지라고 설명했다. 모토로라 측은 이미 지방 산업단지가 조성된 옆으로 2만 8천 평 정도가 필요 하다고 해서 행정 관청의 지원 여부를 확인만 하고 돌아갔다.

나는 문발리에 모토로라 공장부지 2만 8천 평의 매입가격과 부지조성에 필요한 소요경비는 물론 전기가설과 공장이전 등에 필요한 자금, 탄현면 통일동산에서 문발리까지 상수도를 연장하는데 필요한 자금 등을 조속히 검토해 보고하라고 관계국장과 과장에게 지시하였다. 국장의 보고에 의하면, 약 26억 원 정도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 후, 모토로라 코리아의 맹 상무가 찾아와 파주 문발리로 이전을 결정했으니 협조해 달라고 했다.

일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맹 상무에게 공장을 건설하는데 필수요건인 부지매입, 상수도, 도시가스, 전기가설 등에 26억 원 정도가 필요한데, 우리 시에 26억 원을 예치하면 모든 것을 우리가 처리하여 주겠다고 제안했다. 일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시(市)로서는 어려운 조건을 제시했다. 토지매입, 묘지이장 등 주민과 협의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면 공장건설이 지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모토로라 공장의 파주 이전은 확정되었기 때문에 일시에 공장건설 자금을 예치하지 않으면 지원을 못 하겠다고 나는 배짱을 부렸다. 맹 상무는 회사에 가서 사장과 재협의하겠다고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맹 상무는 시의 의사대로 26억 원을 납부하겠다고 했다.

파주시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회사가 아니니 공사 집행내역을 확실히 하여 정산서를 작성해 보고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공장부지 조성은 건설국장이 책임지고 추진하되 군사동의문제, 토지매입, 묘지이장, 상수도 설치공사 등 상세한 계획과 일정을 작성하여 보고하고 회사 측과 협의하여 매수 면적을 확인토록 했다. 측량과 실태조사에 전 직원이 동원되었고 나는 조속한 시일 내에 완공토록 지시했다.

토지매입은 주민이 요구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적정 가격이어서 순조롭게 매수했다. 공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추진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상수도 공사였다. 파평면 장파리 취수장에서 탄현면에 통일동산 조성 시 통일동산까지 부설하여 놓은 곳에서부터 문발리까지 800㎜의 수도관을 약 6㎞를 연결해야 했다. 문발리 공장까지 연결하려면 오도리의 공능천을 건너가야 하는데, 공능천은 조수가 밀려오는 갯벌이었다. 아무리 파내어도 갯벌만 나와 파놓았더라도 금방 무너져 수도관을 고정시키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기술적인 문제가 많아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두 번째는 묘지의 이장이었다. 묘지 주인의 자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 직원들이 찾아가 동의를 받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번 가서 동의되는 일도 아니었다. 두세 차례 방문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묘지 주인의 후손이 외국에 있을 때는 그의 주소를 찾는 일부터 서신 동의를 얻어내는 일 등은 참으로 어려웠다.

국내에 있으면서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가족도 있었다. 묘지 이장에 동의를 하지 않아 묘지를 삼각산 모양으로 지상에 뾰족하게 남겨 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을 사고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대집행절차를 밟아 최후 통보를 하고 유족들이 보는 가운데 대집행을 했다. 그런가 하면 연천군 백학면에 이장할 가족묘지의 토지를 구입하고 이장을 하기 위해 가족이 납골함을 가지고 장지에 갔으나, 부락 주민들이 반대하여 매장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유골함을 그대로 가져와 우리에게 해결해 줄 것을 건의하여서 연천군수에게 전화를 걸어 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아 3개월간이나 유골함을 보관하였다가 마을주민과 이면거래(裏面去來)를 통해 매장한 일도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 직원들이 노력한 결과, 바닥면적 3,000평의 3층 공장 건물은 착공한 지 16개월 만에 준공되었고 공장부지에 필요한 자금도 정확히 정산하여 깨끗이 끝마쳐서 1,500명의 직원에 수출 3억 불($)을 달성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지게 되었다. 현재는 직원이 2,600여명에 달한다. 그 후 모토로라 코리아는 대만계 자본인 ASE Korea로 명의가 변경되어 운영되고 있다.

북한의 관산반도와 직선거리로 5㎞밖에 되지 않는 교하면 문발리에 글로벌 대기업이 가동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공장부지 조성할 때 쌓인 피로가 단번에 확 풀리는 것 같다.

<자료파일 제공 :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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