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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토농지를 경작하던 직천리 주민의 설움-제20화-

pajuin7

대토농지를 경작하던 직천리 주민의 설움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20화-

깊숙한 두메산골, 그곳의 평화롭고 순박한 사람들은 생활을 겨우 유지할 정도의 농경지에서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불평도 없이 오순도순 그들만의 정을 나누며 열심히 살았다. 천현면 직천리(교두네, 벌말, 상상골, 한퍼, 음달말 다섯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음)와 오현리 주민들, 이들에게 1976년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큰 파도가 밀려왔다.

이곳을 1군단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답과 임야 모두를 매수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이주대책도 없이 보상을 해줄 테니 자율적으로 이전하라는 통보였다. 당시의 보상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한 감정평가로 이뤄졌고 산골이라 공시지가도 싸고 주변 환경이라야 산밖에 없어 보상을 늘릴 수 있는 여건도 되지 못했다. 생활할 수 있는 집을 매수하거나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하는데 생활수단이었던 전답의 보상가격으로는 도저히 다른 곳에 집을 구입하거나 지을 수 없었다.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결국, 살아갈 터전을 잃은 것이며 생계를 위협받는 것으로 그야말로 극한의 상황이었다.

직천리 사격훈련장

주민들은 울분이 북받쳐 올랐다. 그렇다고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마땅치 않아 직천리 주민들은 훈련장 조성부대인 1군단 공병여단을 찾아가 항의 데모를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부대를 상대로 시위를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다. 군부대는 국가안보를 내세워 주민을 설득했고 당시로써는 저항하기도 어려워 순박한 농민들은 데모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우르르 몰려가서 대표자가 항의하는 정도였다.

보상을 더 해줄 수 없다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대토(代土)라도 달라고 요구해 1군단 공병대에서는 미수복지구(未收復地區)인 통일촌과 도라산 사이에 있는 갈대밭을 주겠다고 하였다. 갈대밭은 6.25 전쟁 전에는 장단군 군내면 백연리 주민들이 농사를 짓던 농지였지만 지적복구(地籍復舊)가 되지 않아 누구의 땅인지 알 수 없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곳을 국유재산 같이 임의로 공병대에서 출입영농을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출입증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장단군민회’에서는 비록 지적복구가 안 되어 누구의 소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국유지가 아닌 우리 농토인데 공병대에서 직천리 주민에게 대토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항의했다.

이주대책을 하려면 국가에서 국비로 할 것이지, 남의 땅을 임의대로 대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장단군민 회장인 육군 중령 출신의 이은섭 회장이 공병대와 군청에 와서 주장했다.

이 땅이 정말로 장단군민의 개인 소유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등기권리증이나 소유권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 시한을 정해 주었다. 그들은 시한 내에 등기권리증을 가지고 왔는데‘개성등기소’에서 발급한 것이 틀림없었다. 피난 당시 땅문서를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지적도에 등기권리증이 있는 것을 적색으로 표시해 봤더니 70%가 개인 소유로 확인되어 장단군민은 우리 땅을 절대로 남에게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건은 직천리 주민과 같이 출입영농을 시켜 주면 양보할 용의가 있다고는 했다.

나는 1군단 공병대를 찾아가 장단군민의 출입영농을 허락해 주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군부대를 설득한 끝에 장단군민회를 출입영농을 시키되 공병대에서 지정한 논의 절반은 직천리 주민이 경작토록 한다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 논의 분할은 갈대밭에 지뢰가 있어 들어갈 수 없어 갈대밭 중앙으로 흐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상하로 나누기로 하였다.

상편은 도라산 기슭으로 지프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나 있어서 J.S.A로 갈 수가 있었고, 하편은 갈대에 가려 길이 어디로 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상편과 하편의 어느 쪽을 갖느냐를 놓고 직천리 주민과 장단군민 간에 양보 없는 격론이 벌어졌다.

장단군민회는 직천리 주민 때문에 출입영농을 하게 되었으니, 직천리 주민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장단군민의 양해를 구했다. 직천리 주민이 교통이 편한 상편을 택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장단군민은 하편을 차지하게 되었다.

갈대밭은 군부대 입회하에 도라산 쪽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불을 질렀다. 불길은 하늘을 찌르고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불이 다 탄 후에 하천을 조심스럽게 따라가 보니, 상편은 경사진 다락논이었고 하편은 편편한 논으로 농사짓기가 더 편리하였다.

직천리 주민은 한숨을, 장단군민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직천리 주민들은 개간을 하고 3년 동안 농사를 지었으나 천현면에서 도라산까지 가서 농사를 짓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리상으로 멀고, 경사진 농토는 노력보다 수확량이 적었다. 이래저래 농사짓는 것을 망설이던 차에 장단군지주협회의 주장으로 지적복구가 이뤄졌고 원소유자가 나타나 농지를 내놓으라고 하니, 그간 개간비용을 받고 농지 소유자에게 넘기고 철수했다.

직천리 옛집과 농토는 훈련장으로 변하여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정다운 이웃들은 지금 다들 흩어져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굼하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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