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교에 발 묶고 러닝셔츠 흔들던 윤태영 청년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22화-
1906년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철마가 아침저녁으로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도 월롱면 주민들은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소위 그림의 떡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월롱역이 위전리에 세워지기를 원했다.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요구를 하였으나 그들은 공약만 내세울 뿐 당선되고 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중 1967년, 신윤창 의원이 금촌과 문산 사이에 역을 설치할 수 있게 정부와 협의를 보았다.
어느 곳이 좋은지 주민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파주읍 주민은 봉암1리 주라위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월롱면 주민들은 위전리에 세워야 한다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격렬한 싸움이 그들 간에 벌어졌다. 주민간의 의견 조정을 못하여 주민의 편의와는 무관하게 위전리와 주라위 중간지점인 허허벌판에 파주 간이역이 설치되어 40년간 운영되어 왔다. 새로 세워진 간이역을 이용하는 주민이 거의 없자 오히려 주민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민선군수로 출마할 때에도 월롱면 주민들의 숙원사업 중 하나가 위전리에 월롱역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군수로 당선된 뒤, 철도청과 이 문제를 협의했지만 위전리는 경사지이기 때문에 철도에 기차를 세울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기차를 세우려면 철도 부지를 높여 수평을 이루도록 하여야 되는데 수평을 잡고 간이역과 도내리 도로신설 등에 4억 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했으나 철도청은 예산이 없었다. 때문에 자치단체에서 소요예산을 부담하면 역사를 이전할 수 있다고 했다.
예산도 문제였지만, 파주읍 주민의 의견수렴이 더 먼저였다. 파주읍 주민은 파주읍에서 버스를 타고 파주역에서 내리거나 위전리에서 내리거나 금액이 동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반대했다. 파주읍 주민은 봉암리 간이역에서 위전리로 역을 옮긴다는 사실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라위에 역을 신설하고 위전리에도 역 하나를 신설하면 동의하겠느냐고 했더니 이 의견에는 동의를 했다. 1997년, 위전리 4억 원, 파주읍 주라위에 파주역 신설부지매입비 1억 원 등 총 5억 원을 예산 편성하여 철도청과 협의하에 공사를 시작했다.
위전리역을 신설하면서 33년 전인 1965년 8월 어느 날, 오전 8시경 철마가 이곳 위전리에 서야 한다며, 철교에 두 발을 묶고 러닝셔츠를 흔들던 윤태영이란 청년의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태영은 철교에서 위전리에 기차가 서야 한다고 소리치면서 철교 위에서 달리던 기차를 세우려 하였으나 속도를 줄일 수 없었던 기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순직한 지역을 사랑한 용감한 청년이었다. 윤태영의 부인은 남편을 잃고 그곳을 떠나 서울 수색동에 살고 있었다.
윤태영의 부인을 월롱역 준공식에 초청하였다.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기차가 그곳에 멈춰서기를 원했던 윤태영 의사의 바람을 기리며 월롱역사 앞에 그의 추모비를 세우고 주민들과 함께 제막식을 가졌다. 그 후, 철도청에서 서울·문산 간 전철 복선화사업에 월롱역 부지와 파주역 부지를 필요로하여 그곳을 매각하기를 원했고 시에서는 철도청에 8억 원에 매각하였다.
현재는 월롱면 주민이나 파주읍 주민들은 지역을 사랑한 윤태영 청년의 희생정신을 잊은 채, 전철을 자유롭게 이용하며 생활의 편리를 누리고 있다.
윤태영 추모시 | 송달용
사랑하는 가족 어떡하라고
당신의 힘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철마가 서야 할 곳 서야 한다고
의롭고 용감한 32살 젊음만을 믿고
달리는 철마 온몸으로 막으려고
어찌 철교에 발을 묶고 소리쳤습니까?
당신의 참뜻 모른 채
그 육중한 몸체 지나가니
지금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원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33년의 세월이 흘러
당신이 그리도 바라고 바랐던 철마는
이제 위전리에 월롱역 이름 아래 서고
정다운 이웃들이 타고 내리며
당신이 그리도 애틋하게 소망했던
큰 뜻 되새기며 먼 훗날까지
의로운 당신 이름 윤태영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으리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나는 파주인이다’ 목록으로 바로가기
* 관련글 참고 : 파주 경의선 이야기1 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