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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호의 집단익사 사고가 군수의 책임이라고? -제40화-

청평호의 집단익사 사고가 군수의 책임이라고?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40화-

1985년 7월 초, 가평군수 시절의 어느 일요일 오후 였다. 모처럼 경찰서장과 함께 테니스를 치고 있는데, 먼지가 나지 않을 정도로 운동하기에 알맞은 소나기까지 촉촉이 내렸다. 조금 쉬었다가 테니스를 다시 치는데, 이번엔 바닥이 젖을 정도로 소나기가 또 내렸다. 테니스 치기를 포기하고 관사로 돌아오는 길에 뒤따라오던 경찰서장이 내 차를 앞지르며 사고가 났으니 경찰서에 같이 가봐야겠다고 했다. 경찰서로 갔다.

청평호에서 집단익사 사고가 난 것이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생들은 결혼을 하거나 아이들 돌이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가족동반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고는 부부동반으로 26명이 청평 호수공원으로 놀러온 것에서 비롯되었다. 청평 호수공원에는 즐길것도 별로 없던 차에 어느 부부가 연애시절에 가보았던 호수 건너편의 호명리에 푸른 잔디도 있고 경치도 좋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한 것이다.

호명리를 왕래하는 동력선 나룻배에 부부 26명과 호명리 주민 3명, 총 29명이 먹을 것을 싣고 건너갔다. 그러나 푸른 잔디는 없고 그 자리에 별장이 들어서 있었다. 가파른 산 때문에 앉아서 점심을 먹을 장소가 없었다. 길 위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 나오는 나룻배를 탔다.

나룻배는 호명리 마을 소유로 이를 운전하는 사람은 상이용사였다. 그는 배에서 나오는 임금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소유의 나룻배를 상이용사에게 주기로 하고,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엔진을 교체해 주었다. 그리고 개인이 운영할 수 있도록 명의도 변경해 주었다.

26명의 손님을 태운 나룻배가 청평호 중간쯤 왔을 때였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배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뱃전으로 물이 튀어 들어왔다. “물이 들어오니 천천히 갑시다.”누군가 말을 하였고, 나룻배를 운전하던 사람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배가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타고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쪼르르 밀렸고 배는 끝내 뒤집혔다.

청평호에서 수상스키장을 운영하는 노사헌 사장이 소나기가 쏟아져 수상스키 장비에 이상이 없는지, 때마침 확인 점검을 하고 있었다. 호수 중간에서 비명소리가 나서 보니,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룻배가 침수되고 있었다. 노 사장은 급히 보트를 타고 사이렌을 불면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의 머리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인양할 시간이 없어 물에 빠진 사람 주위를 돌며 머리를 잡아끌어서 뱃전을 잡으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구출한 사람이 열아홉 명이었다. 물위로 떠오르지 못한 일곱 명은 익사했다.

나와 경찰서장은 함께 현지로 갔다.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사람들이 맥없이 앉아 있었고 사고 사실이 알려지자, 가족 친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고현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익사자 일곱 명을 인양하기 위해 잠수부를 동원하였다.

잠수부는 익사한 시체 네 명을 인양했으나 나머지 세 명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육지로 나와 태연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인양 못한 세 명은 찾지 못한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추가로 돈을 더 요구했다. 할 수 없이 20만 원을 더 주겠다고 하자, 나머지 익사자 모두를 인양해 왔다.

유족 친지들이 몰려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족과 친지들이 군수와 협의하자고 하여 마을회관에서 회의를 하였다. 군청에서 나룻배 관리를 잘못했으니 보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잘못된 나룻배 관리로 인명 피해가 난 것은 군수의 살인미수죄에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협박을 했다.

나는 나룻배가 군청 소유가 아니고, 개인이 운영하다 사고가 난 것이기 때문에 군청에서 보상할 수 없다고 했다. 군수에게 보상을 청구하려면 법원의 판결에 따라 처리할 문제이니 소송을 제기하라고 했다. 가평군에 와서 사고가 난 것이기 때문에 조의금 정도는 줄 수 있지만, 보상은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회의를 시작한 지 2시간이 흘러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좀 더 검토해보자는 선에서 회의를 마쳤다. 오늘 중에 해결이 안 되면, 내일 또 문제가 계속되고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도에서 일인당 600만 원을 지원해 줄 테니, 유족과 해결하라며 현장에 도착한 백세연 부지사가 지시했다. 부지사는 유족과 만나 협상을 하되, 협의가 되면‘형·민사상 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으라고 했다.

그나마도 600만 원은 도지사가 지원하는 것이니 받으라고 유족들을 설득한 끝에 협의를 하고, 600만 원 수령과 동시에‘형·민사상 하등의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유족들은 그런 내용의 각서는 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형·민사상’을 빼고‘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고쳐 달라고 했다. 수정된 내용으로 각서를 받고 그 날 저녁으로 시체를 운반하도록 합의를 하였다.

시간은 밤 11시 30분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부지사, 경찰서장, 그리고 지역유지들이 함께 모여 한밤의 저녁식사를 하고 협상 상황을 부지사에게 보고하였다. 부지사는 자신의 말 그대로를 형·민사상 하등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각서를 받지 않았느냐고 하길래 민·형사상 문구를 넣을 수 없다고 하여 하등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각서를 받았다고 보고를 했더니 부지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책망을 하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경찰서장이“부지사님 너무하십니다. 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사, 민사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부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청하기 위해 차에 탄 부지사는 군수는 하등의 책임이 없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다음 날 12시 뉴스에‘가평군수 직위해제’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날로 짐을 싸고 이임식은 하지 않고 과장급만 만나 이별을 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청평호에서 익사한 이들은 파주시 광탄면 용미4리 서울 공원묘지에 묻혔다.

공직자에게는 무한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유원지에 놀러왔다가 난 익사사고에 과연, 군수의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직위해제 기간에 광탄면 용미4리 서울 공원묘지를 찾아가 꽃다운 나이에 꿈도 펴보지 못한 고인들을 위해 머리 숙여 명복을 빌었다. 만일 내 자식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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