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7 views

옆집에 병이 났다고 나까지 죽어야 하나? -제43화

pajuin7

옆집에 병이 났다고 나까지 죽어야 하나?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제43화-

위:이한동 국무총리 축산농가 방문/아래: 한갑수농림부장관 구제역농가방문

봄바람을 타고 산과 들에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할 때였다.

축산과장이 파평면에 괴상한 질병이 발생하였다는 보고가 있다며, 상세히 알아보겠다고 출장을 갔다. 평상시와 다르게 출장 가는 것을 보고하고 떠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축산과장의 보고에 의하면, 파평면 금파리 김영규 씨가 운영하는‘권수목장’에 수포성 전염병인 구제역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파평면 금파리 마을은 시청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임진강과는 약 300m 떨어져 있고 평산 기슭에 붙어 있어 몇 년간 너구리 등 야생동물에 의한 광견병이 종종 발생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이 마을 어느 농가에서 광견병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구제역이 무슨 병인지도 전혀 몰랐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구제역의 예방과 방역을 위해서 구제역에 대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구제역(口蹄疫 F.M.D : Foot and Mouth Disease)’은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및 야생 반추류(反芻類) 등과 같이 발굽이 둘로 갈라진 우제류(偶蹄類) 동물의 체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입, 혀, 발굽 또는 젖꼭지 등에 물집이 생기며, 식욕이 저하되어 심하게 앓거나 죽게 되는 급성 전염병으로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는 A급으로 분류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는 질병이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매우 빠르게 전파되어 크게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감염동물의 수포액(水疱液)이나 침, 유즙, 정액, 호흡기 및 변비 등에서 전파되고,

둘째는 감염지역 내 사람(목부, 수의사, 인공 수정사 등), 차량(사료, 출하, 집유 차 등), 의복, 물, 사료기구 등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전파되며,

셋째는 공기(바람)를 통하여 전파되는데, 육지에서는 60㎞, 바다를 통해서는 250㎞ 떨어진 곳까지 전파가 가능하며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에 오염된 식육과 사육 부산물 등 축산물을 통해서도 전염된다고 했다.

김영규 씨가 운영하는 권수목장은 구제역 발생 당시‘홀스타인’ 젖소 성우 13두와 송아지 2두, 멧돼지 1두를 사육하고 있던 소규모의 착유(窄乳) 전업농가였다. 이농가에서 2000년 3월 20일부터 젖소 한 마리가 갑자기 식욕을 잃고 입에 침을 흘리는 등 이상 현상을 보였다. 식체(食滯)인 줄 알고 자가 치료를 하다가 3월 21일 인근 동물병원의 수의사에게 진료를 요청했다.

수의사가 도착하였을 때는 앓는 소가 세 마리로 늘어난 다음이었고 처음 환축(患畜)의 입주위에 수포가 생겼다. 수의사는 해열제로 간단히 치료하고 돌아갔다.

3월 22일이 되어도 증상에 별 차이가 없자, 김 씨는 다시 서울우유협동조합 진료소 수의사에게 진료를 요청하였다. 환축(병든 소)을 관찰하니, 4~5두의 소가 침을 흘려 수의사는 혹시 광견병이 아닌가? 의심했다. 이에 광견병에 경험이 많은 법원읍 공수의(公獸醫) 성차현 씨를 추천하고 돌아갔다.

3월 24일 아침이 되자, 농장의 소 거의가 침을 심하게 흘렸다. 권수목장 주인은 시청에 광견병 신고를 하였다. 축산과장이 현지 확인한 결과,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의심되어 경기도 가축위생시험소 서부지서에 연락을 하였다.

확인한 결과 광견병이 아니라 수포성 전염병으로 판단되어 국립수의과학 검역원에 신고를 하였다. 이후, 검역원에서 축산물 채취검사 등 다각도로 검사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4월 2일 검사결과, 구제역으로 확인되었다. 과거 우리나라의 구제역 발생기록을 보면 1911년부터 1934년까지는 거의 해마다 발생하였다.

특히, 1918년에는 36,397두가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934년 함흥에서의 발생을 마지막으로 구제역이 종식된 후, 지난 66년 간 우리나라에 구제역 발생은 보고된 바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수의사들도 구제역에 대한 관심이나 의심을 하지 않고 광견병으로 오진해 해열제 치료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97년, 대만에서 구제역이 대규모로 발생해 양돈농가가 큰 피해를 입었다. 국립수의과학 검역원은 3월 26일 오후, 의사 구제역이란 보고를 받고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 즉시, 농림부차관보, 국립검역원장, 경기도 가축위생시험소 수의사회, 경기도 제2청사 관계관, 파주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열고 방역대책을 비롯한 가축이동 거리제한, 살처분한 농가대책 등을 논의했다. 당장, 금일 저녁에 권수목장의 젖소 13두와 새끼 2두, 멧돼지 1두를 살처분할 것과 더불어 같은 마을 여섯 농가의 젖소 91두도 살처분하기로 하였다.

권수목장의 젖소 15두는 살처분에 순수하게 응하여 매립 장소는 군부대 훈련장 옆에 소유자의 동의 없이 급한 대로 매몰하였다. 그러나 같은 동네의 병이 걸리지 않은 91두의 여섯 개 농장주인과 파평면의 전 가축 농가들이 면사무소에 모여 병들지 않은 젖소의 살처분을 반대했다. 그들은 생계대책을 세워 주지 않으면 절대로 살처분할 수 없다고 농성했다.

나도 축산농가에 대한 생활대책이 없이는 설득할 수 없으니, 농림부장관은 대책을 밤 12시까지 공문으로 회시(回示)하여 달라고 건의하였다. 밤 1시경 농림부는 경기도 및 파주시와 협의해서 생활대책을 수립하여 축산농가에 피해가 없도록 할 것이니 살처분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6농가 91두를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김정대 파평면장은 농가마다의 애절한 사연을 전해 왔다.

권수농장 주인은 처음 구제역이 발생한 곳이라 항변은 없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파주에서 10여 년이 넘도록 리어카 행상을 해가며 알뜰살뜰 저축하여 마련한 돈으로 젖소 세 마리를 사서 열다섯 마리로 키워 그런대로 재미있게 살아갈 만했는데 이런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고 통곡했다.

다른 여성주민은 시집올 때 받은 금가락지를 팔아 돼지새끼 한 마리로 시작해서 오늘의 열여덟 마리 젖소를 기르게 되었는데 모두 잃게 되었다. 또 한 주민은 어릴 때부터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고생하며 근근이 모은 돈으로 소 한 마리를 사서 열 두마리가 되기까지 자식과 같이 키웠는데 한순간에 다 잃어야 했다. 또 한 농가는 소가 병이 나서 여러 가지 약을 먹여도 낫지를 않아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했고 축산농가의 사정을 상세히 보고 하였다.

집집마다의 사연을 듣고 있자니 나 역시도 내 소를 잃은 듯 너무도 안타깝고 애절했다. 구제역이 어떤 병인지도 모르고 “당신 소가 병에 걸렸소”하면 당연히 처분한다 하겠지만, 건강한 소마저 옆집 소가 병이 났다는 이유로 무작정 죽일 수 없었다. 하니 그들과의 협상은 눈물과 하소연으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축산농가 주인들과 시청의 국장과 과장이 참석한 가운데, 면장실에서 살처분에 대한 합의를 보고 아래층 사무실로 내려가면 그곳에 운집해 있는 타 부락 축산 농가들의 충동질에 변심하여, 합의사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무려 네 번에 걸친 반복 끝에 마무리되었다.

7시간 동안의 힘든 협상 끝에 권수농장으로부터 500m 이내의 젖소 96두, 한우 9두, 멧돼지 1두의 살처분에 합의하고 매립하기까지 밤새 작업이 이어져 다음 날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면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군사시설 보호법상 사전 동의 없이 매립하여 작전에 지장이 있고 불법행위이니 원상복구를 하라는 군부대장의 통보가 왔단다. 나는 즉시 해당 부대의 사단장에게 전화로 구제역의 내용과 살처분을 통하여 즉시 방역을 하지 않으면 급성 전염병으로 전국의 축산농가와 국가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사전매립을 양해해 달라고 했다.

사단장은 구제역 방제에 적극 협조하라고 해당 부대에 지시했다고 통보해 옴으로써 매립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방역문제는 권수농장에서 3㎞ 반경에 14군데 검문소를 설치하고 126명의 공무원을 배치하여 3교대로 근무토록 하였다. 10㎞ 범위 내에 있는 것은 보온 덮개를 깔고 거기에 소독약을 뿌려 오고가는 차량에 대한 소독을 했다. 사료 이동이나 동물을 이동시키는 지역에 대하여는 전체 소독을 하여야 했다. 소독차량이 없어 1군단장에게 소독차량 지원을 요청하여 화학부대의 제독차량 54대를 지원받아 주요 지점에서 차량 모두를 소독했다. 한때는 검문소를 31군데까지 늘리고, 직원을 744명까지 동원해 검역에 최선을 다했다.

구제역이 어느 정도 진정 단계에 들어감에 따라, 10㎞ 범위에 들어간 돼지, 소 등의 매매를 하는 데 있어서는 부산물과 뼈를 발굴하여 살코기만 팔아야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부산물처리가 또 문제가 되었다. 돼지는 40%, 소는 50%의 부산물을 양산해, 이를 쓰레기 매립장에 매몰 처리하였다.

살코기는 2℃내지 4℃에서 24시간 저장했다가 출하하여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구제역 발생 후 돼지, 소고기의 소비가 확 줄었다. 농림부장관을 비롯하여 각급 기관장들이 구제역 지역 내 돼지, 소고기 시식회에 앞장섰고, 인체에 하등의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홍보하였다. 살처분된 농가의 보상 문제도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가축이동 제한으로 축산농가의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컸다. 이에 시에서는 4월 23일 1차 예방접종을 완료하고 한 달이 지난 뒤에 실시한 혈청검사 결과에 따라 6월 5일부터 보호지역을 해제함으로써 급박했던 구제역 방역대책은 조기에 완료되었다.

그간 구제역으로 인하여 검문소에서 밤잠을 못 자고 근무한 공무원과 경찰관, 그리고 군 장병에게 감사드린다. 가축이동 통제와 방역사업에 적극 협조해 준 가축농가에 대하여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마음이다.

다시는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66년 만에 처음 발생한 구제역에 신속한 방역대책을 세우고 처리한 과정을, 농림부 직원과 전국 단위농업협동조합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특강을 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구제역이 다시 발생하여 더 큰 시련을 겪었던 것으로 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음의 시는 2001년 3월 26일 농협중앙회에서 열린 전국 시장·군수대회에 구제역 방역대책 수범사례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고통을 겪은 축산 농가를 생각하며 내가 직접 지어 낭독한 글이다. 파주시는 철저한 방역대책 추진으로 2001년 9월 19일 청정국가로 인증을 받는 데 기여한 바 있다.(파주타임스)

 

구제역 | 송달용

 

고칠 수 없는 병든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지만

이웃집에 병이 났다고

한밤중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몸부림쳐도 죽어야만 했다

돌부리에 채이면서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가

엄마와 함께 애처롭게 죽어야만 했다.

 

꿈과 희망을 마음 가득 안고

온갖 풍상 다 겪으며 미래의 꿈, 삶의 터전

송두리째 땅에 묻어야만 했다.

옛날 평화로운 소박한 농촌

언제 옛 모습 찾을 것인가

텅 빈 축사 어느 세월 채워질까

땅을 치고 발 동동 구르며

 

소리쳐 통곡해도 허공 속의 메아리로

불치병의 비운으로 남는 것이 구제역이란 말인가?

 

– 2000년 3월 파평면 금파리에서

 

<자료파일 제공  도서출판 헵시바>

‘나는 파주인이다’ 목록으로 바로가기

/^^\

One thought on “옆집에 병이 났다고 나까지 죽어야 하나? -제43화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