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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가 사랑한 권력- 파주의 여인들 2편

서울 경복궁- 화완옹주-포스토

 

조선 오백년 역사중 조정의 관료나 평민과 결혼해야 하는 공주나 옹주가 권력을 행사한 것은 화완옹주가 유일무이하다. 화완 옹주는 영조와 선희궁 이씨의 막내딸이며 사도세자의 친 여동생이다.

화완옹주에 관한 이야기는 2007년 9월에 MBC에서 방영한 이산이라는 드라마에서 정조의 왕위 계승 전후로 등장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당시 시청률이 30%를 넘나 드는 인기작으로 정조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암살 음모를 견뎌낸 세손 시절 등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있다.

파주 파주읍 화평옹주묘- 화완옹주-포스토

영조는 왕비로 정성왕후와 선희궁 이씨 둘사이에 2남6녀를 두었으며 딸 중에는 화평옹주를 가장 이뻐하였고 결혼 후에도 사위와 궁궐에 살도록 하였다.

몇 년후 왕위를 이을 효장세자와 화평옹주를 비롯한 옹주들이 요절하였고 나중에 궁녀들이 세자와 옹주들을 저주해서 음식물에 독을 넣었다는 것이 나중에 발각되었다. 이 중 막내인 화완옹주는 혼자만 남게 되었고 영조의 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다.

서울 국악원- 화완옹주-포스토

화완옹주는 화평옹주보다 애교가 많아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만 오만방자하고 질투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화완옹주가 우의정인 정우량의 둘째 아들인 정치달과 결혼하여 출궁하였지만 영조는 궁궐에 별도로 방을 마련해 주어었다.

결혼한 화완옹주는 7년만에 딸을 낳았지만 곧 사망하였고 남편마저도 다음해에 요절하였다. 영조는 효민이라는 시호를 주면서 애통해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족이 후손이 없으면 양자를 들일 수 있다는 궁중법도에 따라 남편 집안이지만 어부의 아들인 정후겸을 양자로 입적하였다.

서울 경복궁- 화완옹주-포스토

영조는 화완옹주가 남편과 사별하자 양자와 함께 궁궐로 들어와 살게 하였다. 이때가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후일 정조대왕) 이 6살이고 양아들인 정후겸은 9살이었다.

화완옹주가 양자인 정후겸과 함께 입궐하면서 궁궐은 노론파와 소론파에게 권력투쟁의 불을 붙이게 되었다. 영조는 숙비최씨인 친모가 무술이 출신이라는 약점이 있으나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는 소론을 지지하면서 아버지 영조와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서울 경복궁- 화완옹주-포스토

그럴 즈음에 화완옹주는 노론파와 손을 잡고 자신의 권력욕을 채워가기 시작하였다. 화완옹주 입장에서는 어릴때 언니들이 총애를 받았고, 남편과 아이가 죽음으로서 비참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정치판에 들어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일반 평민은 재혼이 허락되었으나 왕족은 재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화완옹주는 평생을 정치에만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양자인 정후겸은 처세술이 뛰어났을뿐 아니라 정조와는 3살 차이지만 어부 출신이라는 컴플렉스로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서울 경복궁- 화완옹주-포스토

노론파는 소론파를 지지하는 사도세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끊임 없이 노력하였고 여러가지 방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사도세자를 폐위하거나 죽게하는 것 밖에 없었다. 화완옹주는 계비인 정순왕후 집안과, 후궁 문숙의, 노론파의 신하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영조와 사도세자와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 무렵에 화완옹주는 아버지의 총애로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오빠인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은 여자이기때문에 갖었던 권력을 포기해야되는 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화완옹주가 입궐하고 5년후에는 결국 사도세자(思悼世子)는 뒤주에 갖혀 아사 당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

서울 경복궁- 화완옹주-포스토

화완옹주는 입궐하고서 자신 조카인 이산(후일 정조)을 귀여워하고 보살펴 주었으며 양자인 정후겸과 창경궁에서 함께 놀았던 사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잘해 주면서도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를 미워하고 괴롭혔다.

파주 문산 화완옹주묘- 화완옹주-포스토

한편 정후겸은 고위직 관리들의 자녀를 기용하는 음서로 관직에 올랐으며, 일찍부터 영특하고 언변에 능하여 외할아버지격인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로 17세에는 수찬에 자리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교리와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이후 화완옹주의 양자라는 배경으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승정원좌승지에 올랐으며, 이후 승승장구해 20대의 나이에 병조 참판에 올라 당대의 실권자로 성장했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은 후 화완옹주(和緩翁主)는 본격적으로 막후실세가 되고 영조는 여전히 화완옹주(和緩翁主)를 아껴 영조 말년의 정사는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치마폭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다.

파주 파주읍 화평옹주묘- 화완옹주-포스토

그런데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것에 대해 후회하고 가슴아파하던 터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인 정조를 세손으로 삼는다. 이러한 영조의 의지를 꺾을 수 없자 노론파 신하들과 함께 화완옹주(和緩翁主)는 그의 양자인 정후겸을 앞세워 어떻게서든 정조를 없애려고 갖은 술책을 부린다.

정조가 거처하는 동궁에 에 사람을 심어두고 세손을 감시하였고, 자객을 침투시켜 세손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후에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유포하고 정조의 최측근인 홍국영을 탄핵하는 등 주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파주 조리읍 영를- 화완옹주-포스토

노론파들의 목숨을 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정조를 24세에 대리청정을 맡기고 병권과 순감권을 넘겨 주면 왕의 권한을 갖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영조가 83세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제22대 정조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파주 조리읍 영릉- 화완옹주-포스토

정조 즉위후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측근인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고모인 화완옹주는 평민으로 신분을 강등하였으며 처음에 제주도로 유배시켰다가 강화도 교동, 다음에 육지인 파주로 유배지를 옮겨 주었다.

이와 함께 양자 정후겸은 함경도로 유배하였다가 사사 당하였고, 정조를 제거하려던 노론파 대부분은 주살되거나 유배되었다.

파주 문산 화완옹주묘- 화완옹주-포스토

그러나 조정의 삼사의 대신들은 화완옹주를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상소가 계속되었으나
정조 즉위 24년에 화완옹주의 죄를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리고 궁으로 들어와 살게 하였다.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대에도 탄핵이 있었으나 순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순조실록에는 1808년 5월에 삼사에서 올린 글에서 정치달의 처가 죽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 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화완옹주는 60세가 넘어서 석방되었고 그 후 10여년을 더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인 영조의 후광으로 옹주로서 조선의 권력을 쥐락펴락 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권력을 사사롭게 또 잘못 써봐야 권력의 힘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알게 된다고 한다.

화완옹주가 양자인 정후겸과 노론파의 권력욕은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한 결정적인 요인이다. 권력의 속성이 생존경쟁의 일부라고 하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혈육을 죽게 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 일것이다.

파주 문산읍 화완옹주묘- 화완옹주-포스토

조카인 정조가 혈육에 대한 불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화완옹주를 끝까지 보호하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 장수하였고 사후에는 남편 정치달의 묘가 있는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합장하였다.
그러나 묘비 전면에는 한줄을 비워두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두줄로 남편인 일성위 정치달의 묘라고 표시되어 있다. 아마 화완옹주가 묻힐 것에 대비하여 묘비 공간을 남겨 놓았으나 그 후 옹주가 죽어 이곳에 묻혔으나 추기를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파주 조리읍 영릉- 화완옹주-포스토

눈이 제법 내려 아직 녹지 않은 흐릿한 날에 화완옹주와 화평옹주의 묘를 찾았다. 날씨가 화창한 날 방문하려 했지만 화평옹주의 묘가 군부대에 있는 관계로 일정을 편하게 정할 수 가 없었다.

이백오십여년 전의 화완옹주의 행적을 찾아 보면서 특정한 인물의 혈연과 권력욕은 백성의 뜻과 전혀 다르게 되풀이 되는 역사를 보게 되었다.

또 파주에는 영조가 총애했던 화평옹주와 옹주로서 조선의 권력을 흔들었던 화완옹주의 묘가 문산과 파주리에 가까이 있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묘 소령원과 큰 아들인 진종의 묘 영릉이 광탄과 조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글.사진 이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