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자락에 큰 불이 난 다음날과 어제 내린 봄비로 민통선 안의 산과 들에는 새싹들이 움터 곳곳에 연두색이 물들여 지는 날 진동면 하포리 산 129번지에 있는 허준 선생의 묘를 찾았다.
허준 선생을 일대기로 한 1999년도의 이은성 작가의 소설 동의보감은 3백만부 이상 팔렸고 1999년11월부터 MBC- TV에 방영된 최완규 극본. 전광렬, 황수정 주연의 드라마 허준은 시청률 63.8%로 역대 사극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이 드라마에 관련된 작가와 출연자들 대부분은 일약 대스타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허준 선생도 사후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허준 선생이 쓴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온 사신이 꼭 챙겨가려고 했다는 이익의 성호사설에 기록에서 보듯이 1610년에 쓰여진 베스트북이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 인물과 작품의 가치를 올려 주고 있다.
허준 선생묘는 문산에서 전곡으로 가는 임진강과 인접한 3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파평면 율곡리에서 전진교를 넘어 강건너로 가야 하지만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라 관할 군부대(육군제1사단)의 승인이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전진교를 지나 산자락에있는 2차선 포장길로 따라 올라 가다가 도로 차단을 위해 만들어진 군방어 시설을 지난 후에 막다른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허준로를 1km 정도 가면 좌측편에 군부대가 나타나고 그 곳 맞은 편에 구암교를 지나서 200m 정도 위치에 허준 묘소가 있다.
허준선생묘 진입로에는 판석과 잔디가 깔려 있고 좌우에는 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와 잡목이 무성하여 전형적인 한국의 산을 느낄수 있다. 진입로 우측에는 목재와 기와로 만들어진 제실이 있고 약간 경사가 심한 계단을 오르면 허준 선생의 묘가 나타난다.
허준 선생의 묘소는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가 1982년 허준의 친필 편지를 구하고 부터 그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91년 9월 30일 9년여 만에 발견 되었다.
발견된 허준 선생묘는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과 비슷한 묘와 묘비(墓碑), 문인석(文人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어 땅속에 매몰된 상태였다. 발굴 당시 묘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양평(군) (호)성공신 (허)준 (陽平(君) (扈)聖功臣 (許)浚)”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허준 선현의 묘인 것이 확인되었다.
허준 선생의 출생지에 대하여 일부 학자와 강서구청에서는 허준선생이 양천허씨이므로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구암에서(옛 경기도 김포지역)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구암공원과 허준기념관을 조성하고 있지만 이양재씨는 1930년도에 국세조사를 집대성한 <조선의 성(朝鮮의 姓:1934년>에는 구암주변에 집성촌 뿐만 아니라 가옥이 전혀 없다고 되어 있어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아울러 이양재씨는 허준 선생이 장단군(현재 파주시) 대강면 우근리에서 태어 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허씨대종회에서도 동의하였다고 한다.
출생지라고 보는 우근리는 허준 묘소의 동북쪽으로 1930년도 국세조사 내역에 장단군 독정리(篤正里) 30호, 우근리(寓勤里) 66호가 있었으며, 해방전까지 대규모의 양천허씨 집성촌 있었다고 하며 허준 선조의 묘소가 우근리를 중심으로 도보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몰려 있다.
그러나 허준 선생의 묘역은 선산 묘역에서 떨어져 있어 당시 서자 출신이라 따로 묘를 조성한 것으로 판단되고 9세손인 허규까지 대대로 하포리에 묻혔으며 지난 2004년 9월 24일에는 묘역정비 공사중에 석축부분에서 회곽묘가 발견되었다.
회곽묘 안에서는 지석이나 유품이 발견되지 않아 피장자는 정확히 알수 없었지만 양천허씨대종회에서는 족보 기록에따라 허준의 아들인 조선 광해군때 파주목사를 지낸 허겸의 묘로 주장하고 있다.
묘를 올라 가는 계단을 막 올라 서면 허준 선생묘를 발견하고 정비하면서 세운 비가 있으며 70여평의 부지에 허준 선생부부의 묘 두기와 그 상단에 허준 선생 생모의 묘가 있다.
허준 선생묘 앞에는 표면 상단이 반 정도가 잘려나가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의 벼슬에 어울리지 않는 70cm 높이의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양 옆으로는 문인석이 위치하고 있다.
보국숭록대부는 공신에게 주는 최고의 직위로서 1606년에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 대부로 승급했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가 1615년 11월 상순에 허준선생이 사망한 후 광해군이 다시 추증하였다.
그리고 아들 허겸이 파주목사를 하였으면 여러 부장품과 비석의 규모가 평민과 달라었야하는데 의외로 검소하여 당시 서출에 대한 묘역 관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허준선생은 1546(명종1)년 3월 5일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양천허씨>의 옛 족 보에는 생졸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다행히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 태평회맹도(太平會盟圖: 1604)>의 좌목(座目)에 허준이 기해생(己亥生)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간이 최립(1539~1612)의 <간이집>에 수록된 허준을 송별하며 지은 시 “증송동경태의허양평군환조자의주(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를 참조하면 허준은 최립과 동갑임이 확인된다.
또 허준 선생은 <광해군일기> 7년(1615년) 11월 10일조에 허준의 보국숭록대부 추증에 대하여 나오는 것을 보 면, 11월 상순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삼목영(三木榮)의 <조선의사연표(朝鮮醫事年表)> p.337에는 허준이 1615년 8월 17일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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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선생이 돌아 가신지 390년이 지난 지금에 이곳 문인석을 보며 허준 드라마에서 의녀 홍춘과 상대역인 임오근(임현식 분)의 얼굴이 떠 오르는 것은 드라마에 너무 열중했던 탓 인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의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지만 한국인의 인체와 풍수에 맞는 동의보감을 만들어낸 허준 선생의 끝없는 책임감을 새삼 되새기되고 동양의 의성이라는 허준 선생의 정신이 한국에 있는 모든 의사들의 마음에 심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북쪽 멀리 보이는 산 자락에 그 옛날 마을이 있었음직한 곳에 지금은 군부대 막사가 들어서 있는 곳에서 장병들의 휴일 소란함을 들으며 임진강의 바람으로 마음의 상쾌함을 느낀다
추가 : 아래 내용은 허준성생의 출생일에 대한 의성허준기념사업회 한대희 사무처장의 민족의학신문 기사를 발췌하였습니다-
허준의 출생년은 그동안 1546년으로 알려지고 있었으나 한 원장은 ‘태평회맹도’ 병풍에 허준이 기해생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허준의 출생년은 1539년으로 정정돼야 하며 또한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최립이 저술한 간이문집 8권 휴가록의 내용을 보면 필자인 최립(1539~1612)과 허준이 동갑이란 문구가 나오는데 이를 보아서도 허준의 출생년은 1539년이라는 것이다
<2005.4.11, 이기상>